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평양일기(2)

  • 날짜
    2005-06-20 10:00:00
  • 조회수
    1529

평양을 가다 (2)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개선문은 김일성 경기장, 예전에 평양공설운동장 또는 모란봉 공설운동장 앞에 김 주석의 고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문이다. 높이는 60m, 폭 52.5m 이 사이로 차가 다니는 큰 길이 나 있다. 개선문 양 기둥에는 1925, 1945라고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김 주석이 1925년 14세의 나이로 조국 독립 운동을 시작하여 그 사이 많은 전쟁과 풍상을 딛고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승리하고 돌아온 기념이라고 한다.

 

1945년 10월 29일, 당시 32세 젊은 나이로 평양 시민 앞에 나타나 연설한 김일성. 그가 백발에 흰 수염을 날리며 말 위에서 전쟁을 이끌어 왔으리라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서 한 때 저 김일성은 가짜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보천보 전투에서 첫 승리를 올리고 그 승전에서 민족의 긍지를 느낀 당시 조선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폈고, 20대의 젊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자세히 모르기도 했으려니와 조선 사람이 일본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눴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김일성을 경륜이 있는, 백전노장이며 불굴의 상징으로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싶었으리라.

 

김일성 경기장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고 그 앞에는 김일성 주석이 평양시민에게 사자후하는 모습이 작고 섬세한 타일로 그려져 있다. 지금 그 과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앞으로 오는 6.15 공동선언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에 맞춰 연습을 하고 있다.

 

개선문 앞뒤 정면에는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중략>

 

이라는 김일성 주석 찬양의 노랫말이 부조되어 있다.

 

지하철.
1987년에 준공됨
부흥역으로 들어가 지하 100m 정도의 지하도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이곳이야말로 지하시민궁전이라고 해야 맞으리라. 타일로 된 백두산 천지 그림을 비롯해서 장엄한 샹들리에, 꽃 모양으로 장식된 기둥, 넓은 광장 등등. 동서평양으로는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총 길이는 30km.

 

평양 단고기집.
단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대신 다른 음식을 먹었다. 먹은 사람들은 맛이 좋다고 했다. 오늘 이 식당을 찾은 손님은 우리뿐이다. 30여 명이 넘는 직원 전체가 영접하고 떠날 때는 손들어 환송한다. 고맙지만 한편 마음속으로 서글퍼진다. 그들의 얼굴, 모습, 생활에서 너무나 어두운 그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1만 톤 아스팔트 재료.

인천에서 보낸 아스팔트로 해방산, 거리를 포장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 보인다. 평양에서 남포 가는 길(약 50km)은 새로 만든 곳이라 넓기는 한데 고르지가 않다. 순안 공항에서 평양 시내 들어오는 도로 폭보다 두 배 정도의 넓이다. 안내원의 말로는 앞으로 고속도로는 모두 이와 같이 넓게 만든단다. 남포로 가는 양 옆은 비산비야로 나무 하나 없는 헐벗은 농토가 지속된다.

 

서해갑문은 1981년에 시작하여 1986년에 완공했다(약 5년간). 공사비는 40억 불, 군인 연인원 3만여 명, 36개의 수문, 저장된 물은 29억 톤, 서해 갑문과 이어지는 8km의 방조제가 시작되는 곳에는 양쪽으로 이곳에서 투입되어 노동하는 군중을 상징하는 문주탑이 서 있다. 이곳에서 8km나 뻗어 나가는 이 둑은 남포시와 황해북도 은율군과 연결되어 있다. 둑의 폭은 15m~16m, 높이는 15m. 길 양쪽으로 단선 철로와 차도 및 인도가 놓여져 있다.

 

갑문은 5만t까지는 가능한데 통과하는 시간은 45분 정도다. 몇 년 전에는 7만 5천t도 가능했다고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1000kw의 전력이 나오고 어장도 만들고 대동강과 서해 바다의 고기가 넘나들 수 있는 어로(魚路)도 별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피도에는 서해갑문 기념탑을 세우고 그 정상에는 등대 기능이 설치되어 있다. 예전에는 고깃배가 풍랑을 피하던 곳이라 피도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 서해 갑문이 건설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대동강 깊숙이 올라와 대동강물을 농업용수 및 공업용수로 사용하기 곤란했는데, 이 갑문이 생김으로 43만 헥타르의 농경지를 살려낼 수 있었으며 남포와 황해북도 사이에 교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게 만들었다. 450km의 길고도 먼 대동강 물줄기가 황해바다와 접하는 곳. 이곳에 건설되어 북한이 자랑하는 서해 갑문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민족식당에서 만찬, 이 건물 옆에 윤이상 음악당이 있다.


2005. 6. 1.(수)

 

오늘도 아침하늘은 높고 대동강은 소리없이 흐르고 푸르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의 거리는 150km. 시간상으로는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고 기사는 자신있게 설명한다. 길은 넓고 한가하다. 양 옆으로 심어진 아카시아는 한국에서 늘 보던 그런 것과 많이 다른 것 같다. 꽃이 분홍꽃, 흰꽃 아카시아로 구분되고 나무 줄기가 대나무처럼 가늘고 키가 크지 않다. 적어도 차창에서 내다보이는 아카시아는 고목나무처럼 우람한 한국의 기존 아카시아가 아니다. 묘향산에서 평양으로 되돌아올 때 소나기가 강풍과 함께 잠깐 쏟아졌는데, 길가에 서 있는 아카시아가 뿌리째 넘어진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흰꽃, 분홍 꽃잎의 아카시아가 고속도로에 넘어져 보기에 힘들었다. 붉은 아카시아는 북한에서 10년 전에 개발했다고 한다.

 

어제 남포 갈 때와는 달리 길에서 보이는 동네가 그래도 윤기가 도는 듯 했다. 비록 아카시아로 된 가로수이지만 흰꽃 붉은꽃으로 이어지는 싱싱한 나무는 생활의 여유를 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을지문덕 장군의 영웅적 군사작전을 생각게 하는 살수대첩 그 현장이 청천강이 아닌가! 둑과 둑 사이는 넓지만 물줄기는 낮고 가늘다. 청천강 보다는 청천하(河)가 더 적합한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장마가 지면 강폭 모두를 강물로 채우겠지만 평시에는 농사도 가능한 넓은 강바닥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평양이란 이름은 높은 산이 없는 비산비야의 넓은 평야에 대동강이 흐르는 환경을 전제로 해서 명명되었다고 생각한다. 평양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나 묘향산에 가까워지니 산세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향산 호텔을 지나 “묘향산 국제친선 전람관”으로 향했다. 대리석으로 된 건물, 삼층 형식을 빌린 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나 8층 건물만큼의 높이로 웅장하다. 문 하나 장식 하나에 엄청난 정성을 들여 조성했다고 하겠다. 한 마디로 한국식 기와집이지만 이것은 화려하고 엄숙한 그리고 침묵이 강요되는 궁전이다.(1978년 완공된 것이라고 한다.)

 

입구에 전자 게시판이 178개의 나라에서 219,370점의 선물을 받았다고 가르쳐준다. 첫 번째로 청서관에 들어가니 인조대리석으로 된 김일성 주석이 멀리 정면에 앉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보는 것은 포기하고 한 두 점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었다. 입구에 들어서 왼쪽에 있는 홍콩재단집단 주석이 보낸 “류금공예병풍”이 마음에 들었다. 아홉 마리의 금용이 춤을 추는 네 폭짜리 병풍으로서 섬세하면서도 약동하는 용의 몸놀림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는 살아 뛰어 오를 듯 했다.

 

또 하나는 중국에서 보낸 “대형자기 꽃병”이다. 광동성에서 특별히 제작했다고 꽃병 하단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중구조로 된 이 대형자기는 명품이라 하겠다. 소련에서 레닌의 초상을 넣어 보낸 자기는 선전용은 될지 몰라도 작품성이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인조대리석으로 된 김일성 주석 하단 양 옆으로 “대형건칠꽃병”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보낸 것인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1972년 12월 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은칠보 꽃병”을 선물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7.4 남북공동성명이 이루어져 화해무드가 이어질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게 인상적인 것은 “더불어 숲”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는 글이 많은 선물 속에서 특히나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쇠귀(신영복)의 글이기 때문이리라. 그 외에 정주영 회장이 보낸 대형 승용차를 비롯해서 여러 회사가 기증한 고급 안락의자, 침대 등 많은 물품들이 기증자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이 사람들이 남북한 협력 속에서의 사업을 얼마나 갈구해 왔는가 하는 증표이리라.

랍상관.

방 안에 들어서니 김일성 주석이 살아 서 있다. 등 뒤에는 원근법을 작용하여 산과 들, 나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등신의 김일성 주석 얼굴 표정, 양복 입은 모습이 살아서 걸어나올 것 같다. 여기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연주가 조용하게 실내에 스며든다. 이러한 분위기를 경탄해야 할 것인지 섬뜩하다고 해야할지.(양복 입은 김일성 주석의 생전의 모습은 중국 정부가 기증했다고 설명했다.)

 

 

인천일보  2005년 6월 16일자 1판 15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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