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평양일기 (3)

  • 날짜
    2005-06-20 10:04:00
  • 조회수
    1731

평양을 가다 (3)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향산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보현사로 가다.

보현사를 안내원의 일방적인 설명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불러 보현사에서는 서산대사를 한번쯤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서투른 설명을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의 나이는 72세. 한평생을 도를 위하여 속세를 멀리하고 정진하던 큰 스님이 호국불교라는 이름 아래 살생을 마다할 수 없는 승병의 상징적인 지도자가 될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칠십 평생의 모든 것을 살생의 아비규환 속으로 던지는 그 마음의 아픔은 한없이 컸겠지만 그래도 나라의 산하와 죄 없는 백성들이 왜군에게 짓밟히는 것은 차마 보기 어려웠으리라.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눈덮인 들판을 힘차게 걷는데
혼란스럽게 가지는 않으리라
오늘 내가 걷는 자취는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기 위해서

 

이것이 서산대사의 참담하지만 고독한 결심의 표현이리라.
후일 대사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한 사람이 한평생 조국광복을 위해서 싸워온 백범 김구 선생이라 생각한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남북통일을 위해서 평양행을 결심한 그 심정, 그래서 백범 선생은 서산대사의 시를 경교장을 떠나면서 붓으로 휘호했다. 원본을 영인한 이 글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것을 김구 선생의 자작시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서산대사의 작품이라는 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당시 대사의 심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읽어낸 백범의 마음에는 평양을 향하면서 대사의 시가 아니라 자신의 생애와 생명과 조국애가 함께 융일된 백범 자신의 시가 아니었을까!

 

보현사의 대웅전은 6.25전쟁 때 불타 없어져 버린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라 크게 흥미가 일지 않았다. 다만 대웅전에 모신 주불 비로자나불은 묘향산에서 제일 높은 비로봉(1909m)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웅전 마당에 있는 8각 13층탑은 화강석을 견고하게 다듬어 세운 높이가 8,58m나 된다. 강원도 월정사 적광전 앞에 서 있는 8각 9층 석탑이 밤사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유사하다.
평양, 묘향산, 강원도 평창 지방에 분포된 고구려의 건축술 중 하나로서 고려가 적극적으로 이어받아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보현사의 탑이 층수로는 많지만 월정사의 탑이 높이가 15.2m로 보현사 탑보다 키가 크다.

 

보현사 비는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한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찬하고 문신으로서 왕에게 바른 말을 올리다 두 번이나 유배당한 명필 문공유(文公裕)의 글씨가 아닌가. 역시 6.25전란 때 총상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어 가슴이 아프다.

서산대사비는 6.25전란 때 동강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서산대사란 이름과는 걸맞지 않은 초라한 비석이지만 좌의정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한문학의 대가이며 명나라에 가서 조선의 기상을 내보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찬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좋다. 조선 왕조에서 사대부이며 조정에서 큰 벼슬한 사람이 중의 비문을 지은 것은 이례적인일이라 볼 수 있다. 

 

절문을 나오면서 뒤돌아 절터를 보니 속리산 법주사 앞마당에 온 기분이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쳐 있고 그 한 가운데 넓은 공간이 시원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비슷하다. 묘향산은 예로부터 오대명산의 하나요, 조선 8경 중 으뜸이라 자랑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 옛날에는 태백산이라고 하여 단군이 탄생하여 나라를 세운 곳이다. 또한 법왕봉 오르는 길에 단군굴이 있는 성산인데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서둘러 떠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보현사 서점에서 파는 관광용 책은 모두 영어, 일어, 중국어로 되어 있어 외국 사람을 상대로 만든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묘향산의 관계 서적 “妙香山과 普賢寺”라고 된 중국어판을 살 수밖에 없었다.

 

양각도 호텔에서 만찬(인천 시장 주최).
평양 인민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 화해협력위원회 부위원장 등과 인천에서 온 일행 모두가 참석.
식사 중에 우리들을 안내하는 간부에게 어제 남포가는 길과 산에 나무가 하나도 없느냐고 물었더니 좀 심술난 소리로 “다 알면서 왜 물으십니까?”라고 말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다고 했더니 “땔감이 없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쓰려오며 질문한 것이 미안해진 나는 “남측도 석탄이 상용화되기 전까지는 산에 녹화사업이 힘든 경험이 있다”고 위로했다.

정부에서 나온 전문가에 의하면 북한에는 많은 지하자원이 있지만 인력만으로 석탄을 파내기에는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기계 설치가 되지 않으면 사람이 들어가서 석탄을 파낼 수가 없다. 따라서 석탄을 파낼 수 있는 양이 줄어들고 줄어든 만큼 산에 나무도 자랄 수 없으리라.

 

양각도 호텔 38층(3825호)에서 창문을 열어젖히고 시내를 내다본다. 불 꺼진 시내 저 멀리 은하수보다 흐리게 보이는 불빛 아마도 이것은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어두운 불빛이리라. 작년에는 이보다 더 불빛이 흐렸다고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2005.6.2.(목)

 

만수대 의사당

김일성 주석이 동상으로 조각되어 서있는 옆으로 큰 대리석 건물이 만수대 의사당이다. 이곳에서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예방했다. 접견실에 들어가니 방은 생각보다 컸으며 바른쪽 벽을 채울만한 큰 풍경화가 걸려있었는데 한쪽 끝으로 이 그림을 그린 열 사람의 이름이 있고 그 옆에 “만수대 창작반”을 상징하는 낙관이 있었다. 주체탑, 만수대 큰 벽화 등 모든 것이 공동작업이라 개인의 이름은 없었는데 그 그림에는 특별하게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있어 반가웠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양형섭 부위원장은 키가 큰 노년에 접어든 풍채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조용하고 어눌한 말씨이나 속에 든 말은 모두 여유와 핵심이 있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 통일된 조국을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힘을 합하면 모두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윤기복(과거 북측대표) 위원장이 서울측에서 개최한 만찬회에 참석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윤 위원장의 이마를 유심히 보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북한 공산당원은 이마에 뿔이 낫다고 하길래 사실인가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서 대답하기를 나는 이북 사람도 아니고 고향이 서울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기가 막혔다는 상황을 웃으면서 말했다.

 

김영대 사회민주당 대표이며 민족화해협의회 회장과 안상수 인천 시장이 합의문에 공동으로 서명했는데 낭독되지 않았고 유인물도 없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12시가 넘어서 결정됐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회장은 체격도 크고 성격도 괄괄해 보였다. 김영대 회장의 대화 중에는 “남측 대표들은 약속은 잘하는데 실행이 부족하다. 이번만은 꼭 이행해 주기 바란다. 대표가 바뀌면 약속했던 것이 지켜지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비협조적이다.”라고 이야기하자 인천 시장은 “나도, 시의회 의장도 다 한나라당인데 우리가 얼마나 협조적이냐.”고 역공을 하기도 했다. 물론 웃으면서 주고받는 말이다.

 

평양을 떠나면서 “이렇게 어려운 나라가 있는가. 이렇게 가난이 밖으로 배어나온 도시가 있는가.”라고 속으로 소리쳤다. 인도 서민들의 가난을 직접 본 바도 있다.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생활하고, 뉴델리 역사 철길에 객차에서 쏟아진 똥물을 펌프물로 씻어내는 것도 보았다. 관광객이 버스에서 내리면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거지 아이들에게 당황한 경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유와 생명력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생기가 없다. 산도, 나무도, 바람도, 사람도 생기가 없고 오로지 상징조작물과 구호만이 있을 뿐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양각도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푼 후 2층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직원에게 내가 금강산을 여행할 때 본 “조선미술가사전”과 주영헌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그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호텔을 들고날 때마다 서점에 들렀으나 주문한 책에 관한 소식이 없었다. 직원도 여기저기 열심히 찾아보고 있지만 책이 없다는 데야 속수무책이었다. 귀국하는 날 아침까지 서점을 드나들었으나 결국 책을 사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음 한구석이 서운하다. 책을 구입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제대로 책을 구입할 수 없는 평양의 기능이 안타까워서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생긴 일…
“만수대, 지하철, 평양”의 팸플릿을 모두 압수당했다. 그림까지도 펴본다. 그래도 우표책은 한참 실랑이 끝에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직도 벽이 이렇게 높을 수가 있는 것인가!

 

 

인천일보  2005년 6월 18일자 1판 13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