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평양일기(1)

  • 날짜
    2005-06-18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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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가다 (1)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2005. 5. 30(월)
 

   아침 7시30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모두 42명이 출발하는데 필요한 절차를 거치고 10시에 ‘고려항공’에 올랐다. 비행기 안은 에어컨이 없어 덥기가 한복중이다. 십 수 년 전에 중국으로 역사기행을 떠났을 때 생각이 절로 난다. 구소련제 비행기를 탔는데 냉방장치가 고장나는 바람에 안내원이 부채를 돌리면서 사과하던 일이….
  

   비행기 안에서 안내원이 ‘금수강산’ 5월호, ‘조선’ 5월호, ‘로동신문’ 5월 30일자를 돌려준다. 로동신문 윗면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자’ ‘일편단심 김정일 동지만을 굳게 믿고 따르는 참된 충신이 되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등의 문구가 써있다. 신문을 보면서도 내용에는 눈도 가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기관지’라고 하는 것은 한편 정직하다고 하겠으나 충신(忠臣)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귀빈실에는 바깥과 달리 비행기에도 없던 에어컨이 있어 시원했다. 안상수 인천시장, 박승숙 의장, 김정치 상공회의소 회장, 조건호 옹진군수, 이주삼 시의원, 임남재 적십자 인천지사장이 환담했다.
 “북남관계를 개선하는 것에 인천이 앞장선 것같아 좋다.”(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식)
 “중앙정부만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해왔다. 지방정부로는 인천이 처음이기 때문에 퍽 조심스럽다.”(인천시장)
 평양은 모스크바, 베이징, 쿠바와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공항에 내려서보니 주위는 논밭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가난이 속깊이 배있단 말인가! 영접 나온 관리들 빼고 노동자, 농민 그리고 그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짙게 토해내는 거무스레한 색깔은 힘이 없어 보인다. 버스를 타고 달리며 창밖을 보니 논밭에서 일하다가 도로 가로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벌써 점심을 시작한 것이리라.
 

   버스는 공항을 떠나 가로수가 있는 큰 길을 따라 시내로 달리고 있다. 무릉동굴을 거쳐 금우산 기념궁, 김일성 종합대학, ‘김일성 대원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글이 있는 높은 탑이 보이고 이어 개선문을 지나 만수대에 오른다. 사진에서만 보던 만수대의 김일성 주석의 동상은 참으로 웅장하다.
 중국을 다니면서 모택동의 동상, 석상을 보았지만 이렇듯 장대한 건조물은 처음이다. 이집트의 아부심벨 람세스 파라오의 석상보다는 작지만 동상으로 제작하여 인민기와 함께 양 옆에 약동하는 군상들의 모습을 배치한 구도는 일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군중의 한 사람은 공산당 선언문을 읽고 일하고 싸우고 노력하고 정말이지 세상 모든 일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듯한 생동하는 작품이다. 여기서도 ‘김일성 장군 만세’, ‘타도 제국주의’, ‘백전백승의 맑스 레닌주의 기치 만세’라는 구호가 부조되어 있다.
 

   이 위대하고 장엄한 작품이 누구 손에 생겨났다는 금석문이 없다. 하도 이상하고 궁금해서 시간에 쫓기면서도 동상 뒷면까지 뛰어가 보았으나 역시 문헌은 없고, 다만 1972년 4월 15일 제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김 주석 생일날 제막식을 한 것이리라.
 지도원들에게 혹시 조규봉 선생의 작품이 분명한 듯 싶은데 정확하게 알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만수대 창작사에서 공동으로 제작했을 것이라는 말이 대답의 전부였다. 양각도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대동강을 내려다보면서 좋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김일성 주석의 만경대 고향집을 방문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는 단아하다. 그 집 앞의 우물물을 마셔보니 뱃속까지 시원해졌다. 집 앞에는 들메나무가 서 있는데, 어린 김일성은 이 나무 위에 올라가 대동강에서 일고 있는 무지개를 잡으려는 생각을 했다고 돌에 기록되어 있다.
 만경대 고향집을 옆으로 해서 동산에 오르니 만경대가 서 있다. 평양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니 만경대라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도 양각으로 ‘만경대’라 새겨져 있으나 역시 작자의 이름도 낙관도 없다.
 

    다음은 ‘만경대 소년궁전’을 찾았다. 이 궁전의 또 다른 이름은 ‘품’이라고 한다. 주석이 양팔을 벌려 소년들을 품 안에 안는다는 뜻이리라. 이 건물 앞에 있는 큰 마당에는 용과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기상을 뽐내는 동상이 있다. 소년들이여! 어버이 수령 김일성 주석의 품에서 용처럼 용감하게 하늘로 세계로 약진하라는 뜻이 깊이 밴 것같다. 궁전 안에는 큰 공연장을 비롯해서 국제규격의 수영장, 태권도장, 컴퓨터 연습실, 가야금 연주실, 해금 연주실, 피리 연주실, 노래 소공연장, 바둑 공부방, 양면수 공부방 등이 있는데 방마다 연주실마다 17세까지의 학생들이 자기 기량을 뽐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특히 대공연장에서 어린 학생들은 참으로 모든 면에서 대단했다.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뛰어난 기량이 발견되면 더 높은 전문기관으로 발탁되어 간다고 한다. 여기서 사용한 악기는 국악 관현악이지만 모두 개량된 것이다. 예를 들면 가야금은 12줄이 아니라 21줄이고 해금은 예전처럼 머리가 작지 않기 때문에 소리가 크고 다양했다.
 해금 독주하는 소녀는 어찌나 잘 하던지 환상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절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손풍금실엔 김일성 주석이 찾아와 아이들과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어 눈에 띄는데 이것을 퍽 영광스럽게 자랑한다. 양면수는 중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북한에서 어린 학생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것을 보았다.
 

    ‘인민문화궁전’에서 평양시 인민위원회 양만길 위원장, 김정식 부위원장과 대화를 했다.
 6.25 당시 평양시민이 40만 명이었는데, 미군이 40만 발의 폭탄을 투하했다니 결론적으로 한 사람에 하나 꼴로 계산된다. 따라서 평양은 다 파괴되고 보통문 하나만 남았을 정도였다. 지금은 300여만 명의 시민이 평양에서 살고 있다.
 옥류관에서 만찬을 했는데, 음식도 좋고 냉면도 좋았다.
 밤늦도록 도로공사를 하는 일꾼들,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하나하나 해결하는 모습은 열심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안쓰럽다. 가로등이 없는 길에서 밤 일에 얼마간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힘든 일을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아파트에서 나오는 불빛은 밝지가 않다. 전기 사정이 나쁘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양각도 호텔 38층에서 내다보는 대동강 야경은 드문 불빛이 멀리 보일 뿐 어둠이 깊어 세상에 길이 없어 보인다. 불 꺼진 평양 거리.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도 흐린데 주체탑만은 밝게 빛난다. 이 모순을 어쩌랴!
 호텔 지하층에는 발마사지, 당구장, 노래방, 상점, 술집이 있는데 당구장과 노래방에만 손님이 있다. 시설이라곤 말할 것도 없이 초라하다.

 

 2005. 5. 31.(화)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하늘은 높고 거침없어 평양 시내가 다 보인다.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양각도(羊角島) 호텔은 서울의 여의도처럼 대동강이 흐르다 양 갈래로 나뉜 곳에 생겨난 삼각주인 작은 섬이다. 작은 골프연습장도 있고 경기장 같은 건물도 보인다. 편안한 평양, 가난과 어려움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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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에 있는 사진첩에서나, 또 평양에서 멀리 보이는 주체탑은 오직 탑만 높게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체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높은 계단을 올라오니 넓은 광장에 주체탑이 한 가운데 서 있고 양 옆으로 석조상이 웅장하게 드문드문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서평양을 바라보고 서 있는 주체탑의 높이는 150m. 그 위에 봉화가 20m, 그래서 합계 170m가 된다. 탑 밑에 서니 주체라고 붙인 탑신과 정상의 봉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탑 전문에는 각 국에서 방문할 때 기념으로 보내온 252개의 돌들이(그 돌은 각 나라의 특색있는 돌이라고 한다) 벽을 쌓듯이 빈틈없이 꽉 차 있는데 나라명과 방문단체의 이름 그리고 방문일자와 서명이 새겨져 있다.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밑으로 내려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0m까지 오르면 전망대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서평양을 보면 첫째로 마주 보이는 곳이 인민대학습당(도서관)이다. 그 앞이 김일성 광장이고 광장을 넓게 남겨둔 채 양 옆으로 역사박물관, 미술박물관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여기서 더 주체탑 앞으로 눈을 당기면 푸른 대동강이 소리 없이 흐른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만경대, 중앙 TV 방송탑, 유경호텔,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면 능라도가 눈앞에 푸르게 다가선다. 평양시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서평양을 잇는 다리 수는 12개 정도인데, 전망대에서 멀리 보이는 철다리는 옛날 시골 풍경을 연상케 한다. 탑에서 다시 내려와서 화려하게 꾸며진 귀빈실에 다다른다. 올라갈 때는 지하로 한참 걸었는데 내려올 때는 이와 반대로 귀빈실을 거쳐 문을 열고 나오니 바로 주체탑 방문 기념돌이 있는 그곳이다. 무엇에 홀린 듯 하다.

 여기서 돌아 탑 앞쪽에 서니 300t이 되는 동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노동자, 농민 그리고 인텔리가 서로 협동하는 자세로 서 있고, 그들이 높이 들고 서 있는 것은 낫과 망치 그리고 붓. 김일성 주석이 인텔리의 붓도 국가 건설에 이바지함이 크다고 말해서 이런 동상이 섰다고 설명한다. 인텔리가 노동자, 농민과 함께 서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탑 앞면으로 오른쪽에 예술가, 학생, 농민, 왼쪽에는 광부, 용해공, 무병장수 군상이 돌로 우람하게 조각되어 있다. 온 민족, 온 계급을 등장시켜 하나의 상징으로 이끌어 그 속에서 주체성을 찾았으리라.

 탑신에는 김일성화인 목란 70개가 상징적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것은 김일성 주석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체탑과 개선문을 세웠기 때문이다. 멀리서 본 탑과는 달리 이곳의 분위기는 너무나 장엄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역시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처럼 개인이 아니고 만수대 창작사 사람들이 조성했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도저히 긍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인천일보  2005년 6월 15일자 1판 15면 게재

출처 http://news.itimes.co.kr/Default.aspx?id=view&classCode=101&seq=213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