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하늘은 눈이 없지만 백성의 눈으로 본다

  • 날짜
    2014-05-20 19:14:42
  • 조회수
    954

산동성(山東省) 태안(泰安)에 있는 태산(泰山)은 중국인들이 역사적으로 신성시하는 오악(五嶽)이라는 오대명산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모시는 성산(聖山)이다. 순임금, 우임금을 비롯해 역대 제왕들이 태산에 올라 옥황정(玉皇頂)의 봉선대(封禪臺)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은 『사기(史記)』의 서(書)에 보인다.

황제가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 예를 올리고 하늘과 대화할 때는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물리고 나서의 일이다. 하늘이 내린 명(命)은 황제만 알고 또한 황제가 말하면 그것이 곧 하늘의 뜻이다. 그래서 황제는 천자(天子)이고 곧 하늘이 된다.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시대였지만 전쟁으로 밤을 지새웠던 500여년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통일(BC221)로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은 역대 어느 황제와도, 심지어 중국 신화 속 삼황오제와 비교되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했다.

전란의 시대를 종결한 자신의 업적이면 하늘도 인정하리라 생각하고 태산에 올라 봉선(封禪)의 예를 올리고 비석을 세워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여 만세에 전하고자 했다.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진시황은 그 후 9년 만에 서거했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후세의 왕조에서는 부덕(不德)한 자가 봉선할 때는 재앙을 자초하는 일이라 하여 역대 황제들은 이후 태산에서 하늘에 고하는 일을 더욱 두려워했다.

이처럼 하늘과 직접 대면하고, 하늘의 권위를 받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지닌 황제도 자신을 표현할 때는 항시 스스로를 낮추고, 심지어 사정없이 비하하여 과인(寡人), 고과(孤寡), 짐(朕)이라고 겸손하게 불렀다. 과인은 덕이 부족하거나 세력이 없어 부실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고과는 어리석고 고독하고 부족하다는 뜻으로 과인보다 더 낮춘 말이다. 물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자신의 업적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이긴 했지만, 그는 지나치게 오만했다. 그러나 그런 진시황조차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백성들 앞에서는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고자 했다. 짐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서민들이 ‘나’란 뜻으로 통용하던 말을 스스로 자신을 겸칭(謙稱)하는 말로 사용하도록 칙령으로 정했다. 짐은 청나라 말까지도 사용되었는데, 짐의 여러 뜻 가운데 고대에는 배주(舟)를 의부(意符)로 하여 ‘잔 받침’이란 뜻도 있는 ‘짐’을 ‘황제’가 스스로를 칭하는 뜻으로 통용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제왕은 천하의 권력과 부를 마음만 먹으면 모두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어도 생명력이 강한 민초들의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하늘은 눈이 없지만 우리 백성의 눈으로 보고 하늘은 귀가 없지만 백성의 귀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천리(天理)를 알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겸양의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하(下)」편에 보면 목민의 의무와 지도자의 덕이란  무엇인지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맹자가 지금 산동성 북쪽에 있던 평육(平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대부(大夫) 공거심(孔距心)에게 묻는다. “그대의 병사가 하루에 세 번 병영을 이탈한다면 버리겠습니까? 용서하겠습니까?” 그는 단호하게 “세 번까지 기다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맹자는 “그대도 대오를 이탈함이 많습니다. 흉년에 그대의 백성들 중에 노약자들은 병들고 죽어 도랑에서 굴러다니고 건장한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 수천 명이나 됩니다.”라고 다그치니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아마도 윗분들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으리라).” 맹자는 “그렇다면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지금 소와 양을 받아다가 기르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목장과 꼴을 구할 것인데 목장과 꼴을 구하지 못하면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서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겠습니까?” 그제야 대부 공거심은 제 잘못을 깊이 인정했다.

어느 날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뵙고 “왕의 행정구역을 다스리는 다섯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자는 공거심 한 사람뿐입니다.”고 전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이것은 과인의 잘못입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제나라 선왕은 수도 임치(臨淄)에 직하학궁(稷下學宮)을 만들어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이 자유로이 비교되고 서로 다듬어서 더 깊은 학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 왕이기에 명군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나라 선왕의 덕과 책임감에 더욱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이천사백 년 전의 맹자가 오늘 살아있었더라면 오늘의 지도자는 진도 앞바다 참사를 책임질 사람을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은 없었는가를 살피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여야 정치지도자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은 맹자 당시에도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자기가 가르쳐야 될 사람을 신하로 삼기 좋아하고, 자기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맹자는 말하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 이 글은 2014년 5월 14일자 인천일보와 인천in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