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삼황오제의 역사화와 실체화

  • 날짜
    2013-12-12 11:3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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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태초에 신화와 전설의 세계가 있었다. 서구문명의 기초를 이룬 그리스에는 제우스(Zeus)를 비롯한 신들을 통해 올림퍼스에서 펼쳐진 신화의 감성과 정서가 인간사와 무척 닮아 있다. 그래서 사랑·증오·저주·성공·실패·죽음으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시·연극·노래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다가왔다.


이와 비슷한 시기 중국에도 개천(開天) 시기에 삼황(三皇, 복희·염제·수인)과 오제(五帝, 황제·전욱·제곡·요·순)라는 중국문명을 설명하는 전설과 제왕학이 있다. 반신반인(半神半人) 같은 존재들을 인격화한 것은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史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유가 경전인 「상서(尙書)」에서도 역사를 요임금부터 기록했다.

사실 공자 이전에는 요임금과 순임금에 대해 언급한 이가 전혀 없었다. 가장 오래되고 믿을 만한 기록인 「시경(詩經)」을 보아도 요순에 대해선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실제로 요순에 관해 논하기 시작한 것은 「논어(論語)」, 「묵자(墨子)」, 「맹자(孟子)」다. 중국에서 자랑하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아예 훨씬 후대 역사인 전국시대(B.C 403년)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중국과 유교에서 성천자라고 존경을 받는 요임금은 우리나라 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檀君王儉)과 같은 시대 인물이라는 게 흥미롭다. 요임금 자체도 그렇지만 요임금 이전으로 올라가면 역사는 신화와 전설이라는 상상의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를 보면 황제와 염제의 싸움, 또 염제 손자인 치우(蚩尤)의 복수전에서 황제가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의 치열함을 매우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가 단군으로부터 시작되듯 중국은 혼란한 천하를 제압한 황제(黃帝)로부터 비롯된다. 새얼문화재단 중국역사기행단은 얼마 전 하남성 정주시 황하(黃河)에 있는 `염황이제소상경구(炎黃二帝塑像景區)`를 탐방했다. 중국은 1987년부터 이 지역을 성역으로 조성하기 시작해 지난 2007년 9월에야 준공했으니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성된 지역의 면적이 어마어마한데, 염황광장의 총면적만 하더라도 15만㎡로 축구장 20여 개 면적에 필적한다.

산 중턱에 세워진 조상(造像)의 전체 높이가 106m, 그중 하단 구조인 산의 높이는 55m, 조상의 높이만 51m나 된다. 코의 길이가 8m, 눈의 깊이도 3m에 이른다. 이쯤 되는 규모다 보니 높은 곳에 조성된 조상의 형체가 정확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것이 `염황의 자손(炎黃之孫)`이라는 중국 민족의 상징물이다. 황하는 중국문명의 발상지이고, 어머니의 강(母親河)이다. 또한 세류를 포용하고 백천(百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무한히 앞으로 전진해 바다로 나아가는 황하는 중국인의 정신이며 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곳에 과거 천하를 두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사이였던 황제와 염제를 기념하고 있다.중국은 결코 황제만의 자손도 아니고, 염제만의 후손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쌓아온 역사와 문화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동시에 일종의 혈연관계를 웅변하는 듯하다. 최근에는 할아버지 염제의 원한을 갚기 위해 무기를 발명해 황제와 아홉 번 싸워 아홉 번 이겼으나 결국 탁록 들판에서 황제에게 사로잡혀 죽은 치우조차 중국민족의 조상 중 하나로 모신다. 치우가 죽은 뒤 그 후손들은 황제에 투항하거나 남쪽으로 돌아가서 서주(西周)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민(黎民)이라고 불렀다.

치우의 후손들은 전쟁을 잘했기 때문에 황제는 그들에게 병권을 주관하도록 해 천하를 바로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치우는 패자이면서도 승자에게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져 병주(兵主)라는 칭호를 얻었고, 제왕이 천지에 올리는 제사에서 천주(天主), 지주(地主)에 이어 세 번째 경배의 대상이 됐다. 또한 승자의 군기(軍旗)에 치우의 형상이 그려져 황제의 장병들에게 사기를 높여주었다. 그래서 중국 민족의 시조는 염제, 황제, 치우이며 중국인들은 염제, 황제, 치우의 자손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일한 이는 황제였다. 황제가 중국 민족의 가장 중요한 시조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포용정책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천하의 종족들을 규합해 오늘날 하족(夏族), 화족(華族), 화하민족(華夏民族)이라 불리는 중국 민족의 선조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이 전설과 신화 속 인물들을 불러내 기념하고 장대한 공간을 조성해 실체화하고, 그것을 광역화·역사화·성역화해 관광 유적지로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다. 92%의 한족, 8%의 55개 소수민족이 정신적·역사적으로 조화를 이루기 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 이처럼 공을 들여 노력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단일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광복 68년이 지나도록 통일의 기초조차 다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부끄럽고, 후손들에게 무어라고 변명할 수 있을지 안타깝기만 하다. 역사 앞에서 우리는 양심도, 치욕도 모르는 민족으로 돼가고 있다.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 이 칼럼은 인천일보 2013년 12월 11일자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