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한옹(汗翁) 선생을 추모하며

  • 날짜
    2013-11-04 16:27:46
  • 조회수
    406

1.
1960년대에서 70년대, 80년대의 암울한 시대를 거치며 한옹 신태범 박사님은 방황하는 저에게 따뜻한 안식처였습니다. 당시 저의 삶은 3·15부정선거반대, 4·19학생의거 동참에 이어 5·16군사쿠데타로 혁명검찰부에 의해 구속, 이후 노동운동으로 이어질 때 그리고 당시의 노동운동은 파업권이 없는 사회운동의 황무지 상황에서 산별노동조합이 창설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루하루가 힘들고, 정보기관의 눈초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옹 선생은 “자네가 가지고 있는 힘만큼만 사회를 개혁해야지. 자기 능력 이상 과도한 욕심을 내면 그나마 지속적으로 작은 노동운동조차도 할 수 없다”고 저에게 충고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내 생활의 일부분으로 하기에는 더 많은 부정과 긍정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혁명검찰부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는 일 년여 동안 당시 동지들은 모두 언론계 아니면 국회의원 비서 및 정계로 갔고, 유일하게 저만 노동현장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저는 정의와 개혁에 목마른 20대 중반이었습니다.

박사님은 훗날 제가 혼사에 주례를 허락받으러 갔을 때 “내가 자네를 처음 대했을 때는 불덩이 같아서 말을 걸 수가 없었네. 이제는 그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네”하면서 서울 명동 YWCA회관까지 오셔서 저희 부부를 주례로 축하해 주셨습니다. 이때 박사님은 본업인 의술보다는 이 지역의 역사·인물·문화 등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습니다. 특히 박사님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실 정도로 높은 학구열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저로서는 언제나 새롭고 많은 지식과 경륜 그리고 이 지역에 관해 살아있는 지식과 이야기를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님의 병원 이층은 항시 개방되어 있어 뜻있는 인천 젊은이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병원과 살림집이 함께 있어서 사모님께서는 번번이 이렇게 모여든 젊은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곤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찮고 힘드셨겠습니까.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움이 가슴을 넘칩니다. 이 사랑방에 출입했던 젊은이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취미와 관심을 많이 가지고 열심히 다녔던 것 같습니다. 이때에 들은 이야기 중에는 평생 가슴에 지니고 살아야 할 보배 같은 일화가 많은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2.
1946년 1월경 죽산 조봉암 선생이 박사님이 운영하시던 ‘신외과’를 찾아 입원했습니다. 이유는 1932년부터 신의주형무소에서 8년간 고생하실 때 손끝이 잘려나갔는데 이것이 때만 되면 아프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낮에는 병원 일을 보시고 밤에는 죽산 선생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더라도 죽산 선생의 입장에서 한옹 선생처럼 교양과 문화 등 다방면에 지식을 갖춘 사람과의 대화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를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신 박사님만큼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대해 식견을 갖춘 분은 드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달 후쯤 죽산 선생으로부터 신 박사, 모임이 있으니 나오라는 연락이 있어, 어른이고, 존경하는 분의 말씀이라 지정된 장소에 나갔더니 그 자리가 바로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식이었습니다. 죽산 선생이 인천 책임자가 되고 몇 분이 부위원장으로 선발되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신태범’이었습니다. 박사님은 한 달여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죽산 선생을 찾아가 저는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으니 사퇴하겠다고 했답니다.

죽산 선생은 “힘들었을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나도 신 박사가 부러워. 나는 떠나고 싶어도 나 홀로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네”라고 했답니다.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죽산 선생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사퇴하고 그해 8월에는 공산당과도 결별하고 남한단독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제헌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됩니다. 그러나 죽산 조봉암 선생과의 이 짧은 인연 때문에 오래도록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로 몰려 많은 고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님은 저와의 대화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의 인격과 풍모에 대해서는 한 줌의 원망은커녕 언제나 큰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3.
올해로 신태범 박사님이 탄생한 지 100년이고, 귀토(歸土)하신 지 10년이 됩니다. 박사님께서 생존해 계셨다면 올해로 100수를 맞이하셨을 겁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박사님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휘명(諱名)하여 존함을 제하고 평소 제가 모시던 박사님으로 부릅니다.

어느 날 박사님께서 “지 회장! 자네 영어 이니셜이 어떻게 되지?” 물어보신 적이 있었는데 무심한 저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얼마 후 박사님은 제 사무실을 친히 방문하여 “자네에게 평소 신세를 많이 졌는데 이 몽블랑 시계와 만년필을 전함으로써 고마움에 대한 내 뜻을 대신하고 싶네” 하셨습니다. 박사님이 주신 만년필에는 제 영자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시계와 만년필을 받은 저는 황송하고 고마운 마음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즈음 벌써 박사님은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박사님이 병원에 출입하고 계신 것을 숨겨왔기 때문에 그때 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에게 사별하는 마음으로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제 와 생각합니다.

또 박사님께서는 저에게 “인천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이 있거든 더 물어보게” 하셨는데 그때까지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던 저는 나중에 찾아뵙고 말씀 여쭙겠다고 했습니다. 궂긴 소식을 듣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둔감한 사람이었던가! 자탄하며 죄송한 마음과 함께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박사님께 인천에서 겪고 살아오신 과정과 이 지역에서 활동하신 분에 대해 물으면 항상 사실에 근거해 제게 차분하게 답해주곤 하셨습니다. 자신의 명을 알고서도 저에게 주신 고마운 말씀을 알아차리지 못한 불찰을 생각하면 지금도 저는 등에서 식은땀이 납니다.

박사님은 로터리클럽 활동을 하시면서 총재까지 역임하셨지만 본래의 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는 상황을 항시 아쉬워했습니다. 클럽에서는 아호(雅號)를 ‘Doctor 愼(닥터 신)’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부르면 재미없으니 그냥 ‘딱신’이라고 부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두들 그대로 ‘박사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를 불러 “내 아호를 한옹(汗翁)이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박사님은 “나의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면서 땀을 흘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땀을 흘리는 늙은이”라고 설명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이 가슴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박사님의 마음은 이렇듯 젊고, 미래를 설계하고, 완성해 가려는 의지를 품고 계셨구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박사님은 돌아가시던 날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셨습니다.

젊은 날 때로는 제 피가 너무 뜨거워서 혈관에서 불이 날듯 휘몰아칠 때 항상 찬물로 식히며 깨닫게 해 주신 그 은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붉은 노을에 회광반조(回光返照)하며 후학들에게 더욱 심오하고 좋은 말씀과 원숙한 풍모를 보여주셨을 것이란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절실합니다. 그러나 박사님이 이 지역 젊은이들에게 그간 남겨주신 정신과 마음은 세월이 갈수록 크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박사님이 후학들에게 남기신 말씀을 훗날 정리해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편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