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당 태종과 그 사람들

  • 날짜
    2009-01-12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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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과 그 사람들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 598~649)과 조선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은 7백여 년의 간격은 있으나 흡사한 점이 아주 많다. 이세민은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형이자 태자인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살해하고 아버지이며 당 고조 이연(李淵)을 압박하여 당나라 2대 황제에 오른다. 이방원 역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조선왕조 태조이며 아버지인 이성계를 밀어내고 3대 임금에 등극한다.
 그러나 이세민은 왕자들의 제위(帝位) 경쟁에서 오는 처참한 골육상잔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적장자(嫡長子) 이승건(李承乾)의 승계를 원했지만 아홉 번째 아들 이치(李治)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 이방원 역시 장자인 양녕대군을 포기하고 셋째인 충녕대군(후일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세습했다. 두 사람 모두 성도 이(李)요, 시호도 태종(太宗)이니 어느 젊은 학자가 두 사람의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공과를 함께 비교 연구한다면 무척 흥미 있는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해본다.
 조선왕조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이방원이지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중국의 수많은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한결같이 이세민을 위대한 황제라고 칭송하고 그를 모델로 삼고 본받으라고 한다. 당 태종의 재위 23년을 정관(貞觀, 이세민의 연호)의 치(治)라 하여 이 시대를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여긴다.
 당 태종 통치의 근본은 이인위본(以人爲本)이다. 이것은 민본사상을 토대로 한 왕도정치의 성공에 있다고 하겠다. 첫째, 당 태종은 적을 포용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승리했으면서도 정적인 태자 이건성의 핵심 참모들을 죽이지 않고 능력에 따라 자신의 심복을 만들었다. 그 중에 위징(魏徵)은 이세민을 선제공격하여 죽이자고 권유한 장본인이었지만 당 태종은 그의 성실함과 원대한 포부를 알아보고 자신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중신(重臣)의 지위에 올린다. 당 태종이 고구려침략에 실패하고 돌아오면서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이번 전쟁을 말렸을 텐데 하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남아있을 만큼 대단한 신뢰를 보냈다.
 둘째, 화합의 정치에 있다. 수나라의 전성기에는 인구가 4천만 명에 이르렀는데 수 양제를 거쳐 당나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1천5백만 명으로 인구가 격감되었다. 수 문제에 이어 수 양제는 세 차례에 걸친 요동정벌 과정에서 압록강을 건넌 수나라 병사 30만 중에 살아 돌아온 병사가 불과 3,700여 명이며 평양으로 진군했던 수군(水軍) 역시 몰살당했다(위의 수치는 중국의 대학역사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다). 무리한 고구려 침략의 실패와 가혹한 수탈로 인해 민초들은 떠돌이가 되거나 군역을 피해 불교와 도교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도첩을 받은 승려가 36만여 명이고 도교에 몸담은 이들도 역시 비슷한 숫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 태종의 아버지인 이연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 이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 근간은 불교와 도교였기 때문에 당 태종은 사회적 화합을 위해 아버지와는 달리 이들의 환속을 취소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 태종은 스스로 백성들에게 검소한 삶의 모범을 보였다. 그 한 예가 일부만 남기고 3천 궁녀를 출궁시킨 사실이다.
 셋째, 당 태종과 신료들은 역사에서 배웠다. 당 태종과 신료들은 수나라의 폭군 양제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몸소 겪었다. 이렇게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세운 사람들이었기에 역사의식이 투철했다. 중국에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작하여 『청사(淸史)』에 이르기까지 24개의 사서가 있는데 이것을 중국의 24사라고 한다. 그중 3분의 1인 8개의 역사서가 이때 편찬된 것들이다. 그래서 이 시절의 신료들은 상소를 올릴 때마다 항상 역사를 검토하고, 이를 밑바탕으로 현장의 목소리와 비교해가며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근래 우리 정치인들은 모두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 하나 역사를 예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논리를 설파해가는 경우를 볼 수가 없다. 과거의 역사에서 배울 줄 모르니 시민들에게 날 것 그대로의 자기  주장만 강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민족이든 참혹한 시련을 겪고서도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그 아픈 시련을 또 한 번 반복한다는 역사인식을 명심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2008.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