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천하위공(天下爲公)

  • 날짜
    2016-12-14 16: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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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대만, 양안(兩岸)에서 다함께 존경받는 인물, 손문(孫文, 1866~1925)은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주창자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강소성 남경(南京)에 위치한 종산(鍾山) 손문의 묘에도, 광동성 광주(廣州)에 있는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에도 손문과 관계있는 곳이나 기념물에는 반드시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글이 높이 걸려있다. 나는 이 말을 `천하는 천하의 것이며 천하의 모든 사람의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이 글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 2절에 나오는 글이다. 2000년 전에도 벌써 이런 생각과 글이 있었다는 것은 인류문화의 지적 자랑이다.

`대도(大道)가 행해진 때에는 천하가 모두의 것이다. 현명한 사람과 유능한 사람을 선발했고 신의를 강구하며 친목을 다졌다. 이 때문에 자신의 부모만 부모로 여기지 않았고 자신의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에게는 편안하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었고, 젊은이에게는 임용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홀아비나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사람도 모두 부양받을 수 있었다. 남자에게는 직분을 주었고, 여자에게는 귀의할 곳이 있게 했다. 재물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 재물을 꼭 자신에게만 사사로이 감춰두려 하지 않았다. 능력이 자신의 몸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염려했지만 그 능력을 꼭 자신을 위해서만 사사로이 쓰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모략은 중지됐고 도적이나 난적(亂賊)도 생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바깥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으니 이를 일러 대동(大同)이라 했다.`

 

옛사람들은 대동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천하위공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와대를 비롯해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국세청 등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는 순간 천하를 잊으면 그 힘은 곧 자신의 사적 권력으로 남용하게 된다. 대통령 직선제 30년에 광화문 광장과 전국 시·도의 거리에서 스스로 일어난 시민, 농민 및 학생 등 보통사람들의 정의를 향한 평화적인 깃발은 촛불 명예혁명으로 정의된다.

자치통감 1권에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주에 의해 다스림을 받은 체제에서 훌륭한 힘과 탁월한 지혜를 지닌 영재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군주 한 사람에게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군주 자신에게 그들보다 뛰어난 힘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류사회에 질서가 필요해 여러 여건에 의해 선발·추대된 군주를 통해 그 질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인류사회 질서의 정점에 서서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러한 권력은 군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마광은 이러한 실례를 자치통감 34권에 기록한다.

한 무제는 방만하게 나라를 운영해서 노년기에는 재정이 바닥 나고 나라가 어지러워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한 무제를 이은 황제들은 하나같이 외척(外戚)인 왕(王)씨, 부(傅)씨의 발호 때문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성제(成帝, 재위 BC33~BC7)는 닭싸움을 즐겨서 신분을 가리고 시장을 돌아다니는 무책임한 청년이며 허(許) 황후를 폐하고 조비연(趙飛燕) 자매를 궁으로 끌어들여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생활로 생을 마감했고, 애제(哀帝, 재위 BC7~BC1)는 남색에 빠져 동현(董賢)에 집착해 정신없는 생활을 지속했다.
나라는 서서히 외척인 왕씨 세력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애제는 외척 부씨들에게는 벼슬을 하사하고 남색인 동현에게는 수 만금과 높은 벼슬을 내렸다. 이를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강직한 간대부(諫大夫) 포선(鮑宣, ?~?)은 `… 대저 관직은 폐하의 관직이 아니라 천하의 관직입니다. 폐하께서 관직에 맞지 않는 사람을 선택하면 그 관직은 그 사람에게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고도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복종하기를 바라십니까?`고 직간했다.

 

관직이란 현명하고 유능한 천하의 선비에게 수여해 천하를 함께 다스리는 공공의 도구이지 황제가 사사로이 총애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상이 아니라는 생각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놀라운 일일뿐만 아니라 그 결기가 하늘을 찌른다.

 

당나라가 중흥기를 지나 안사의 난(安史의 患亂, 755~763)을 거치면서 조정은 힘을 잃고, 지방에 파견된 절도사가 군대를 장악해 군의 지방분권화로 전횡을 일삼을 때 덕종(德宗, 재위 779~805)은 군을 불신해 황제의 직속인 금군(禁軍)의 지휘를 환관(宦官)에게 맡겼다. 환관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관들은 그 지위를 남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밤낮이 없었다. 백성과 상인을 수탈하고 관직 임명에도 영향을 행사해 뇌물을 받았으며 양자를 들여 권력을 이어가려 했다. 환관의 면종복배(面從腹背)의 속성을 간과한 탓이다. 이러한 상황에 명재상 육지(陸贄, 745~805)가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린다(자치통감 권229).

`배는 임금의 도(道)요, 물은 백성의 마음입니다(舟卽君道 水卽人情). 배는 물의 도를 따라야 물 위에 뜰 수 있지만 그것을 어기면 침몰합니다. 임금은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지위가 공고해지지만 민심을 잃으면 위태롭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옛날 성군들은 백성들 위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반드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천하 백성의 마음에 맞추려 했지 감히 천하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욕심에 맞추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소문을 읽을 때 옆에 서 있던 모든 신료들이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글 중에 군주는 배, 백성은 물이라는 내용은 순자(苟子) 〈제왕〉편에 처음으로 보이며 그 뒤에는 당태종이 즐겨 사용한 것을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면 알 수 있다. 저 타오르는 민심은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가 아니라 힘차게 솟아오르는 샘물이어서 굽이치는 긴 여정을 거쳐 여울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그 역동성을 누가 막으랴! 그 동력으로 차분하게 부의 양극화를 줄이고 또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통일의 길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성현과 황제들까지도 마음속으로 체득한 순리를 오늘의 정치권에서 겸허히 받아 촛불 민심을 명예혁명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천하가 요구하는 것이고 역사가 주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