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왜 『사기(史記)』인가? ⑧ - 공자를 흠모한 사마천

  • 날짜
    2016-07-18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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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왕조가 힘을 잃어 평왕(平王)이 호경(鎬京)을 버리고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BC770년부터 진(秦)황제가 천하를 통일한 BC221년까지를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라고 하는데 진(晋)나라의 큰 귀족 한(韓), 위(魏), 조(趙) 세 가문이 제후로 인정받은 BC403년을 기준으로 이전을 춘추시대, 이후를 전국시대로 구분한다. 이것은 주 황실의 쇠퇴를 상징하는 것이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외견상 서양의 봉건제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종법제(宗法制)에 있다. 종법제는 봉건적 관계가 군주와 신하 개인 사이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군주와 가신이 속해 있는 씨족 사이에 성립되는 것을 말한다. 유력한 제후는 대부분 주 왕실과 동일 씨족인 희성(姬姓)에 속해 있었다.

왕과 동성(同姓) 제후는 봉건적 주종관계뿐만 아니라 본가(本家)와 분가(分家)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異姓)의 제후 역시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왕실을 종가로 섬겼다. 따라서 중국의 봉건제는 공동의 조상을 모시고 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공동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 왕실이 권위와 힘을 잃으면서 나라의 기둥으로 작동했던 종법제가 무너지니 자동적으로 서서히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세력이 강한 제후국이 인접 제후국을 병합하면서 140여 개에 이르던 제후국이 10여 개국으로 재편되었다.

구질서가 무너지고 신체제는 미처 확립되지 않은 시기여서 제후국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국강병책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우경(牛耕)과 철제 농기구의 사용, 관개(灌漑)사업으로 농업이 발전하고 상공업 또한 발전하여 대도시가 형성되고 청동화폐가 사용되었다. 이로써 전통적 사회조직이 무너지고 일반 서민들도 능력에 따라 출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사상적으로 이러한 사회변화가 반영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불리는 사상가 집단이 출현하였다. 이렇게 되니 지축이 흔들리는 큰 변동이 몰려오면서 신분제도가 무너져 지배계급의 몰락과 함께 봉건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으나 오히려 사람의 자유의지로 꽃을 피우는 생각이 만발하여 사상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공자(孔子, BC552~BC479)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업고 한미한 하급무사의 아들로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 안 씨가 숙량흘의 정부인이 아니기 때문에 공자는 사생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자(嫡子)는 아니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기록을 대략 살펴보면 “숙량흘은 시씨(施氏) 딸과 결혼하여 딸만 9명을 낳으니 아들을 얻기 위해 둘째 부인을 들여 아들 맹피(孟皮)를 낳았다. 자는 백니(伯尼)라고 했는데, 그는 다리가 성치 않았다. 숙량흘은 다시 안씨 집안에 구혼했다. 안씨에게는 딸이 세 명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모두 거절했으나 막내딸 징재가 16세의 나이로 허락했다. 아마도 공자의 아버지는 벌써 70세를 넘었으리라.” 사마천이 「공자세가」에서 니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얻은 공자를 야합(野合)이라고 한 것은 숙량흘이 늘그막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지만 적출자(嫡出子)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어려서 빈천했다. 그런 까닭에 하찮은 일에 많이 능할 수밖에 없었다. 군자는 재능이 많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한6>

공자는 성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천민으로 태어나 극난한 현실을 극복하고 제자들을 키우면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방략과 열정이 있었다. 공자가 존경하여 사숙(私淑)한 사람으로는 박학군자(博學君子)로 명성을 떨친 정(鄭)나라의 자산(子産, BC580~BC522), 『안자춘추(晏子春秋)』의 저자인 제(齊)나라 재상 안영(晏嬰, ?~BC500), 유가(儒家)의 전통적 군자로 추앙받는 진(晋)나라 재상 숙향(叔向, ?~?) 그리고 공자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예악(禮樂)을 일으킨 주공(周公)을 꿈에서도 찾았다. 이렇게 존경하고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분이 많았지만 자신은 가난해서 스스로 독학으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인격적으로 독립했으며 마흔에 흔들림이 없어지고 쉰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 남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위정4>

이것은 공자가 자신의 칠십 평생을 뒤돌아보면서 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할 것은 고아로 자라면서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학문만 알고 부(富)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를 구해도 된다면 비록 채찍을 잡는 사람이라도 나 또한 하겠지만, 만일 구해선 안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 <술이11>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누구든지 새로운 시대 상황에 잘 적응하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부귀도 획득할 수 있는 세상이 당시의 추세였지만, 도가 행해지지 않아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안 될 세상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학문의 길을 택하겠다는 뜻이다.

“만일 주군이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벼슬자리를 그만두어야 한다. 나라를 경영하는 자는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며 백성의 수가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 대개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합하면 백성의 숫자가 적은 것도 없으며 편안하면 기우는 것도 없다.” <계씨1>

“제후국인 노나라 재상 계씨(季氏)가 재산이 많은데도 그를 위해 제자 염구(冉求)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두었다고 공자 문중에서 파문하고 공격하라고 진노한다.” <선진16>

“초나라 섭공(葉公)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서 물으니 대답하지 못했다. 이 말을 듣고 너는 어찌하여 ‘그 사람이 분발하면 밥 먹는 것도 잊으며 즐기면 근심도 잊고 늙는 줄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술이18>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해 탐구하는 사람이다.” <술이 19>

원래 군자(君子)란 군주의 아들을 의미한다. 이는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 즉 소인(小人)과 대비되는 말로서 세습귀족을 말한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는 의를 근본으로 하고, 행동할 때는 예로써, 나타낼 때는 공손하게, 그리고 신의를 지킴으로써 완성한다” <위령공17>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공자가 말한 군자는 학덕을 겸비한 이상적인 위정자를 지칭한다. 공자 이후의 군자는 공자가 뜻한 바대로 정의되었다. 따라서 공자의 후학들은 세습하는 군주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진정한 군자이며 국정운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풍조가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공자는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평생 천하를 주유(周遊)하며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의 뜻인 군자철학을 펼치지 못했다. 그래도 절망하거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 끝내 실망하지 않고 60 후반에 고향에 돌아와서 때에 따라 자신의 천명을 인지하고 많은 문헌들을 정리하고 제자를 키웠다. 특히 『춘추(春秋)』를 정리한 공자의 학문과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수 있다. 공자 이전의 『시경』, 『서경』은 경전으로서 현실에 적용되는 원천에 불과했다. 그러나 『춘추』에서는 역사가 분석과 평가 등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왕이나 제후도 대의명분에 어긋나면 비판하고 폄하하고 정의를 세우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이 생겨났다.

“공자께서 병환이 위중하자 자로가 기도드릴 것을 청했으나 공자는 거절했다.” <술이 34>

죽음 앞에서 공자는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것, 자기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공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모든 것이 상식이요, 또한 인간중심주의의 전형이다. 세상만사도, 역사와 상식에 바탕을 두었고, 희로애락, 명예, 권력, 색(色)의 힘과 매력을 알면서도 자신의 길을 올바르게 걸어간 어른이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출중한 힘과 지혜가 있었고, 그 방법도 알았지만 길이 아니면 걷지 않은 사람이며, 2,600년 전에 처음으로 사숙(私淑)을 열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양성(위령공 38)한 교육혁명가. 그래서 우리는 공자를 만세의 스승[萬世師表]으로 모신다. 또한 공자의 가르침의 결정체인 『논어』는 모든 제자백가들이 중심에 놓고 이로부터 모든 논쟁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마도 사마천이 공자의 가문을 제후들만이 기록되는 세가에 올린 것은 도리어 지하에서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를 지성(至聖)으로 모실 만하다고 했는데, 『시경』 「소아」를 인용해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했다.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 길처럼 따라간다. 내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마음은 늘 그를 따르고 있다”고.

 

* 이 글은 <인천일보> 2016년 7월 13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