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아침대화 30주년

  • 날짜
    2016-05-16 10: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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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당시의 사람들은 3면이 바다로 되어 있고 물자가 풍부한, 지금의 산동성에 위치했던 제(齊)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리라 예상했는데 도리어 황량한 서북쪽에 치우쳐 문화·문명이 뒤처져있던 진나라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 근래 젊은 중국학자들 사이에 이에 대한 연구가 진지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종전의 이론은 진(秦)나라의 월등한 무력을 우선으로 꼽았는데, 지금은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진나라에 정승이란 직책이 마련된 이후 재상 25명의 이름이 보이는데 그 중 17명이 타국 출신이고 평민이 재상이 된 사례도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진나라를 우뚝 세운 개혁가 상앙(商鞅, ?~B.C 338)은 위(衛)나라 사람이고, 또 한 사람 이사(李斯, ? ~ B.C 208)는 초(楚)나라 사람입니다. 이사가 외지인들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고 진시황에게 올린 간축객서(諫逐客書)는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외국의 엘리트를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그 지성을 활용할 줄 알았고, 또한 소통이 가능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갖춘 제나라를 누른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이 바로 해불양수(海不讓水)입니다. 바다는 물을 가려 선택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사의 “泰山은 不辭土壤이며, 故로 能成其大하고 河海는 不擇細流라, 故로 能就其深이고, 王者는 不却衆庶, 故로 能明其德입니다”라는 <간축객서>의 말을 사자성어한 것입니다.

근대 인천은 새로운 삶을 찾아 팔도강산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시작된 도시입니다. 그러나 주민들 간에 불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해불양수의 정신이 배어있는 곳입니다. 더욱 이 땅은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곳입니다. 그래서 새얼문화재단은 해불양수와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시작부터 인천 정신의 기둥으로 삼고 있습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지속 가능한 삶과 목표를 지향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인천은 남한의 서북쪽 막힌 도시로 해방 이후 지금껏 7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도시가 됩니다. 참말로 통일의 주역이며 희망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인천시민은 평화통일의 주역이며 그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새얼문화재단이 시민의 힘으로 41년을 이끌어온 것은 인천 시민의 새로운 힘이며 정신입니다. 아침대화 360회, 가곡과 아리아의 밤 34회, 계간 황해문화 23년 발간 등, 전국백일장 31회, 국악의 밤 25회, 인천 어른들의 동상 건립 등의 사업들이 이토록 오랜 세월 지속가능했던 것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성원과 새얼문화재단 회원의 적극적이고 끊임없는 성의에 그 뿌리가 있었음을 가슴깊이 새깁니다. 특히 소리 없이 뒤에서 관심과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여러분께 더욱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