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왜 『사기(史記)』인가? - 3

  • 날짜
    2016-02-17 16: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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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열전 70편 중 끝자락에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가 있다. 내용에는 집안내력과 학문적 배경, 경력, 이능(李陵)을 옹호하다 거세당하는 상황을 비롯해서 『사기』를 집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끝으로 『사기』 130편의 내용을 짧지만 정곡을 찔러 이야기하고 있어 자서전의 성격이 짙다. 「태사공자서」에서 중국 민족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설명하면서 「본기」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옛날 황제(黃帝)는 하늘과 땅을 법칙으로 삼았다. 시조 황제를 뒤이은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네 분의 성인(聖人)은 사계절의 운행에 따라 각각 법도를 이루었다. 요 임금이 왕위를 순에게 양위하자 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천하는 이들의 공덕을 찬미하여 만세토록 전할 것이다. 이것이 오제본기를 제1편으로 지은 이유다.”

황제는 온 우주에 중심이 있고 네 분의 왕들은 자연의 순환을 사람과 합일시켜 제도를 만들었다. 순임금은 요임금에게 자리를 양위 받았음에도 기쁨보다는 그 책임이 무한이므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전설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었지만 맹자(孟子, B.C.372?~B.C.289?)는 이들을 역사 속 사실로 받아들여 이 시대를 기본으로 틀을 잡아 철학, 사상, 윤리 등 모든 정신분야의 중심으로 삼았다. 따라서 『사기』의 「본기」는 근본(本)이 되는 기록(記)이라고 평할 수 있다.

황제로부터 전욱, 제곡, 요, 순 등 제왕은 왕위를 쟁탈이 아니라 선양(禪讓)받아 이어 내려온 성인들이라 이들에 대한 흥망성쇠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순임금으로부터 선위(禪位)받아 하(夏)왕조를 세운 우임금은 아들 계(啓)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부터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세습(世襲)정권이 시작되었다. 통치권이 부자 세습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임금 자리가 사유재산이 되었다는 뜻이다. 임금 자리가 사유재산이면 그 지위를 덕치로 얻었든, 무력으로 쟁취했든 부락연맹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생겨나고 이에 따라 부(富)의 불평등도 함께 시작되어 자연발생적으로 부패가 나타나는 것은 역사의 순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국 고대사에서 3대(三代)라 하면 하(夏)·은(殷)·주(周) 세 왕조를 의미하는데 사마천은 이것을 「하본기」, 「은본기」, 「주본기」로 기록한다. 물을 다스려 홍수를 막기 위해 13년간의 고생으로 지쳐있었지만,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성실한 우왕의 하 왕조는 471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17대 걸(桀)왕 대에 와서 왕은 자신의 안락만 추구하고 백성들의 삶을 전혀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력으로 억압했다. 당시 백성들은 “이 태양은 언제 사라지려나. 나 차라리 너와 함께 죽어버리리라.”라며 저주했다고 전한다.

하나라 걸왕을 멸하고 은(B.C.1600~B.C.1048) 나라를 세운 탕(湯)왕은 후덕하여 망개삼면(網開三面)이라는 사자성어로 유명하다. 사면을 다 막아서 꼼짝 못하게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삼면을 뚫어놓아 백성들의 처지를 이해하여 관대하게 다스리면서도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이윤(伊尹)과 같은 노예를 등용하여 좋은 정치를 하였다. 탕왕이 죽고 552년 후 29대 주(紂)왕에 이르러 주지육림(酒池肉林, 술로 연못을 만들고 나무에 고기를 매달아 숲을 이루고 그 사이로 나체의 남녀가 밤새도록 술래잡기를 하는 광란의 혼음연회)과 포락(炮烙)이라는 잔인한 형벌을 창안한 폭군으로 충신과 백성을 버리더니 주나라 무(武)왕에 의해서 은왕조의 막이 내린다.

주 왕실 800여 년은 중국 왕조 문화의 유산이자 초석이 된다. 기원전 1000년경에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무왕이 세운 주나라는 275년을 이어오다가 12대 유(幽)왕에 이르러 그 아들 평(平)왕이 수도를 낙읍(洛邑)으로 옮기니 전(前) 수도 호(鎬)나 풍(豊)보다 동쪽에 있으므로 이전 시대를 서주(西周)라 하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한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의 서막이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500여년이 지속된다. 서주는 비교적 평온한 시대였으나 동주 시대는 전쟁으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사상, 경제, 사회, 농경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특출한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27대 원(元)왕대에 시작되는 전국시대(B.C.403~B.C.221)는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니 물산이 풍부해진 덕에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어갔음에도 인구가 급증했다.

동주시대는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과 인물이 넘쳐나지만 주황실이 자기 실력으로 봉건시대를 통치하던 서주시절에 잊을 수 없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文)왕의 할아버지 고공단보(古公亶父)를 사마천이 「주본기」에 남긴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융적(戎狄)이 쳐들어와 재물을 요구하니 싸움을 피하기 위해 내주었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쳐들어와 땅과 백성을 차지하려고 하자 백성들도 모두 분개하여 싸우고자 했다. 그러자 고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장차 자신들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오. 지금 융적이 공격한 까닭은 우리의 땅과 백성 때문이오. 백성이 나에게 속하든 저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들이 나 때문에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백성들의 아비나 아들을 죽여가면서 그들의 군주 노릇을 하는 격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

고공은 가족과 함께 떠나 기산(岐山) 아래 정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뒤를 이었다는 내용이다. 고공은 나라를 군주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백성 편에 서서 행동한 것이며 하찮은 서민들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한 것이다. 삼천년 보다 더 먼 이야기지만 오늘의 어느 정치철학이 이보다 더 우수할 수 있을까.

주나라 10대 여(厲)왕 때 국운이 서서히 기울 때의 일이다. 여왕은 즉위 30여 년 간 재물만 탐하고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중용했다.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들리자 여왕은 위(衛)나라에서 술수를 부리는 첩자를 초빙하여 백성들을 감시하도록 했다.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운 언동을 하는 자는 가차 없이 구금하여 살해했다. 백성들은 겁에 질려 입을 다물고 사방의 제후들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여왕은 이를 보고 “백성들의 불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걸, 어느 누구도 왈가불가하는 놈이 없다니까!”라며 거들먹거렸다. 그러자 충신 소공(召公)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아뢰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길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일단 둑이 터지면 다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백성의 입도 이와 같습니다. 물길을 잡으려면 적절하게 뚫어줘야 하듯 백성의 입도 열어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국정에 임하면 문무백관에게 정치를 풍자하는 시를 쓰도록 권합니다. 사관에게는 역사기록을 올리라고 합니다. 악사에게는 잠언에 곡을 붙이라고 합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알립니다. 황제는 이런저런 의견을 참고하여 그 중에 도움이 되는 말을 찾아 국사에 반영하기 때문에 그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을 막으면 안 됩니다.”

여왕은 듣지 않았다. 이후로 누구도 여왕에게 감히 충언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3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동란으로 번지니 왕은 도피하고 말았다. 태자 정(靜)은 피하지 못하고 소공의 집에 숨어들었으나 백성들은 소문을 듣고 소공의 집을 포위했다. 소공은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간언했건만 여왕이 듣지 않아 오늘날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태자를 내주면 백성들이 죽여 버릴 텐데 그렇게 되면 여왕은 내가 그를 원망해서 태자를 내친 것으로 알 것이다. 충신이라면 끝까지 충성을 다해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소공은 자기 친아들을 태자로 위장시켜 백성들에게 내주었다. 소공의 아들은 끝내 백성들의 손에 맞아죽고 태자는 살아남았다. 여왕은 멀리 도망치고 어린 태자는 숨어 있어 국정이 혼미를 거듭하자 소공과 주공이 황제를 대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共和) 정치라 부른다. 황제가 없는 동안 백성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기를 14년 여왕은 망명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확인한 소공은 자기 집에 숨어있던 태자 정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11대 선(宣)왕이다. 공화는 우리 헌법 전문에도 보이는데 이 말의 어원은 2천8백여 년 전 폭군을 쫓아내고 백성이 정치에 자기 뜻을 반영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 글은 2016년 2월 17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