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왜 `사기(史記)`인가 -1

  • 날짜
    2016-01-20 08: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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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책의 수도(2015.4.22~2016.4.11) 인천이 개최한 `시민의 애장도서 전시`에 필자는 중국정부가 자랑하는 `전세장서(傳世藏書)` 총 137권 중 `이십육사(二十六史)`의 첫 권 `사기(史記)`를 제출했다. 진(秦)나라로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1000여종의 전적(典籍), 약 2억5000만 자의 방대한 `중국역대문화요적(中國歷代文化要籍)`인 `전세장서`는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출판한 `사고전서(四庫全書)`보다도 더욱 각고의 노력을 들였다는 중국 문헌상의 큰 업적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은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태어난 곳은 용문(龍門), 지금의 섬서성 한성(韓城)시 지천진(芝川鎭)이다. 10여 년 전 그의 무덤을 찾았을 때만 하더라도 묘에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있고, 눈앞으로 흐르는 황하와 쓸쓸한 들녘이 전부였다. 그러나 3년전에 다시 가보니 동상이 높이 서 있고, 그 앞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문화광장`이 조성됐다. 중국 역사문화의 창시자라는 긍지가 중국인 가슴에 파고들도록 말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곧잘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이야기한다. 그 까닭은 진시황(秦始皇, BC259~BC210)과 한 무제(漢武帝, BC154~BC87)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분오열된 전국시대( BC403~BC221)를 힘으로 끝내고 중국천하를 통일시킨 진시황의 업적을 계승해 발전시킨 한 무제 역시 남으로 월(越)지역을 평정하고 동으로는 고조선을 공격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으며, 서역으로는 장건(張騫, ?~BC114)을 파견해 교통로를 개척했다. 그로부터 훗날의 실크로드가 시작됐다. 

북쪽으로는 기원전 119년 흉노정벌을 가장 성공적이라고 하지만, 14만필의 전마가 출전해 돌아올 때는 3만필에 불과했다고 기록돼 있다. 유목민 특유의 치고 빠지는 전략에 익숙한 흉노의 기병에 비해 보병 중심의 한나라 병사들은 고전을 면할 수 없었지만, 이처럼 막대한 전비와 병사들의 희생을 담보하고라도 흉노를 견제했던 것은 중국 역사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 장생불로를 추구했던 것도 두 사람 사이에 기이할 정도로 유사한 측면이다. 무속과 미신에 빠지는 정도는 한 무제가 진시황보다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분서갱유(焚書坑儒)하면 그의 업적과 관계없이 진시황을 무조건 폭군으로 여기게 된다. 진시황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기 전까지 춘추전국 500여년은 낮밤을 전쟁으로 지새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사상과 학술의 황금시대였다. 문물교류가 활발했으며 소를 농경에 사용하는 기술이 발달해 생산력이 증대됐고 시장이 성립하는 등 경제의 폭이 깊고 커졌다.

 진나라에 의해 망한 다른 여섯 나라의 신하들은 울분과 슬픔을 서사와 학문에 담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통치자에게는 고마운 일이 아니라 걸림돌이었다. 이를 간파한 이사(李斯, ?~BC208)는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린다.

 사관(史官)은 진나라의 기록이 아니면 모두 태워버리고 박사관(博士官)의 직책이 아니면 천하의 시서와 제자백가를 소장한 자는 관리에 넘겨 모두 불사르게 하고 짝을 지어 시서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기시(棄市, 사람의 목을 베어 그 시체를 저잣거리에 버려두는 형벌)하고, 옛것을 기리고 지금을 비방하는 자는 멸족해야 합니다. 의약, 복서(卜筮), 종수(種樹)의 책은 남겨두되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십시오.-`진시황 본기`
 
이것이 이른바 후세학자들이 말하는 `분서` 사건이었다. 훗날 환관 조고(趙高)의 모함에 의해 자식과 함께 비록 제 명을 다 못하지만…. 겉으로는 애국하고 충성하는 듯 보이지만, 권력자의 눈치와 입맛에 맞는 가혹한 법령을 만들어 시행하고 백성의 실상과 아픔을 돌보지 않았던 혹리(酷吏)가 바로 이사 같은 사람이었다. 

진시황이 양산궁에 행차했는데 산 위에 승상의 수레가 많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불만스러워했다. 그런데 누군가 이를 승상에게 전해 나중에 보니 그 수가 줄었다. 이것을 안 진시황은 궁 안에 누군가 자신의 말을 전한 자가 있다고 생각해 지목된 관련자를 심문했지만,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진시황은 지목된 관련자 유생 480명을 산 채로 구덩이에 묻어 죽이니 이것이 `갱유`였다. 이 사건 이후 학자들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분산돼 사라졌으니 이를 두고 책을 태운 분서와 유생을 죽인 갱유라 해서 분서갱유라 부르는 것이다.

 한나라의 관료제는 진제국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왜냐하면 한나라의 제도를 기안했던 신료들 대부분이 진제국 아래에서 벼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에 올랐지만, 함께 패업을 이룬 동지들은 예법을 몰라 종종 그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진나라 출신의 숙손통(叔孫通)이 중심이 돼 새롭게 궁정 예법을 다듬고 제정한 뒤에야 비로소 유방은 `이제야 황제가 된 것 같다`며 경탄했다.

그런 이유에서 한나라는 구조적으로도 진나라와 흡사한 측면이 많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기록에 따르면 한 무제는 담력도 제법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틈틈이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백성들의 생활 터전을 직접 시찰하곤 했는데, 그 와중에 생명을 잃을 뻔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 무제는 관료제의 병폐인 혹리의 발호와 아첨꾼에게 포위돼 있었다.

재위 기간 중 큰 전쟁만 다섯 차례나 강행했고, 이에 따른 세수 부족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짜내는 기술자 장탕(張湯)을 중용하기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 명석한 신하들이 하나둘 떠나 외로워졌고, 공포정치를 강행했으므로 이때부터 한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유학을 받드는 정책을 내걸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진시황과 다를 바 없는 독재정치를 강화한 황제가 바로 한 무제였다.
 
이것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파헤친 것이 사마천이었으며 백성의 힘이 역사의 본류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사기`는 불멸의 역사서가 될 수 있었다. `사기`는 12본기(本紀), 30세가(世家), 70열전(列傳), 8서(書), 10표(表) 등 모두 130편으로 구성돼 있는데 52만6500자라고 자신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황제(黃帝)에서 시작해 한 무제 초기에 끝나는데 통틀어 3000여년에 이르는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저술한 통사다. 그러나 유방으로부터 무제에 이르는 약 백년간의 역사가 `사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는 당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왕조나 황제의 기록은 수백 년에서 수십 년의 실록인데, 이것이 본기이다. 그러나 항우(項羽, BC232~BC202)는 나이 삼십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활동한 시기는 8년 밖에 되지 않는데도 황제 반열에 올려 항우본기를 기록했다. `천하를 쪼개어 왕과 후를 봉하니 항우로부터 정치적 권력이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그 시대와 공간을 이끈 세력을 가진 사람은 천명과 통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초와 한의 5년간의 대전을 유방과 함께 선도적으로 지배한 항우는 황제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자들 중에는 사마천이 항우를 본기에 올려놓은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도 많았다. `통사(通史)`를 쓴 당나라 사학자 유지기(劉知幾, 661~721)는 저서에서 패왕에 머물렀던 천하의 도둑놈을 황제 반열에 올려놓았다며 비난했고, `사기색은(史記索隱)`의 저자 사마정(司馬貞)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명·청 시대를 거치며 사마천의 뜻을 긍정하는 조류가 크게 번져나갔다.
 
그런데 사마천은 왜 항우의 최후를 그토록 영웅적이면서 인간적으로 애절하게 기술하고 있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첫째, 수년에 걸친 유방과의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동정해 유방에게 단판승부를 청하는 모습은 비록 투박하지만 영웅답고 그 의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보았다. 

둘째, 해하(垓下) 전투에서 패해 쫓기는데 오강(烏江)을 지키는 관리가 배 한 척을 가지고 와서 항우에게 고향인 강동으로 가기를 청했다. 이에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서 뭘 하겠는가? 또 내가 강동 젊은이 8000여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받아준다고 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나! 설사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나!`라며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이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앙모해 사당을 세우고 향을 사르며 제사를 올리는 장군은 삼국시대 의리로서 천하를 감동시킨 관우, 남송시대 흔들림 없는 충성으로 천하를 울린 악비, 난세의 영웅이었지만 교활한 유방에 비하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후덕했던 항우뿐이다. 그래서 후세의 시인과 작가들은 유방의 이야기는 뒷전이고 너도나도 항우를 소재로 작품을 지었다. 송나라 때 여류 문인 이청조(李淸照, 1084~1155)의 하일절구(夏日絶句)를 보자.

 `生當作人傑 살아생전에는 세상의 호걸이 되고 / 死亦爲鬼雄 죽어서도 귀신의 영웅이 되었네 / 至今思項羽 이제 항우를 사모하는 것은 / 不肯過江東 강동으로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부패했던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휘종(徽宗, 재위 1101~1125)과 그 아들 흠종(欽宗, 재위 1126), 그리고 그 권속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나 뒤를 이은 고종(高宗, 재위 1127~1162)은 싸울 의지마저 잃고 항주로 천도하는 상황에서 애국심과 투지가 없는 현실을 개탄한 감동적인 작품이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역시 항우에게 매력을 느껴 `항우와 유방`을 집필했는데 이 작품은 벌써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고, 경극 `패왕별희`는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항우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술과 작품의 소재로 승화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면 나라를 개국한 유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우를 그리워하는 연유를 마음에 새겨볼만하다.

 

* 이 칼럼은 <인천일보> 2016년 1월 13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