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중국공화원년(中國共和元年)

  • 날짜
    2015-07-09 16: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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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군성조께서 기원전 2333년에 이 나라 조선을 세웠다고 배운다. 그래서 금년이 기원후 2015년이면 기원전 2333년을 더해 단군이 지금으로부터 4348년 전에 나라를 창업한 것으로 계산한다. 이 해를 중심으로 단군기원(檀君紀元)이라 하고 보통 단기(檀紀)라고 칭한다. 중국의 기원은 어떻게 설명·진화되고 있는지 공부하면서 우리를 뒤돌아보는 것도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이 저술한 『사기 본기(史記本紀)』 첫 장에 「오제본기(五帝本紀)」가 나온다. 이것은 중국의 시조 황제(黃帝)와 그 일가 및 후손 다섯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황제 다음이 전욱(顚頊)인데 이는 황제의 손자이고 그 다음이 제곡(帝嚳)인데 황제의 증손이 된다. 우리가 그나마 들어본 일이 있는 요(堯)임금은 제곡의 아들이니 황제의 현손(玄孫)이 되고, 요임금에게 선위(禪位)받은 순(舜)임금은 황제로부터 아주 먼 변족(邊族)에 불과하다. 순은 촌에서 농사짓고 고기 잡는 촌부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사람에게 자기 두 딸을 시집보내고 왕위를 주다니 이것은 전통을 무시한 권력문화혁명이다. 그래서 요임금을 더욱 높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사마천은 오제본기를 기술하고 나서 “학자들이 오제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지만 아득히 오래전 일이다. 그래서 상서(尙書)에도 단지 요임금 이후의 기록만 실려 있다. 또한 백가(百家)들의 서적에 황제에 대해 말했지만 그들의 문장이 아름답지도 믿을 만하지도 않아 학자나 사관(史官)들은 말하기를 꺼린다.”고 했다. 조상의 역사라 기록은 하지만 신뢰하기엔 조심스럽다는 뜻이 배어 있다. 그래서 황제 이전 삼황(三皇)이라 불러온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수인씨(燧人氏)는 사기에서는 취급하지 않았다.

우(禹)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위(禪位)받아 세운 나라가 하(夏)나라이고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악한 고문으로 이름난 폭군 걸(桀)을 치고 새롭게 창업하니 이 사람이 은나라의 탕(湯)임금, 또 문왕(文王)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주(紂)를 섬멸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주나라다. 주 왕실이 세월이 지나 10대(代) 여왕(厲王)에 이르러 오만하고 포악하여 사치가 극에 달하자 세금을 무리하게 징수했다. 충신 예량부(芮良夫)가 “왕실이 장차 쇠퇴할 것입니다. 영이공(榮夷公)은 이익을 독점하면서 큰 재앙을 알지 못합니다. 이익이란 만물에서 생기는 것이며 천지가 다 같이 소유한 것이어서 독점하면 재해가 많아집니다. 천지만물은 모든 사람들이 같이 써야 하거늘 어찌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분노가 심해지면 큰 재앙에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듣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여기저기 비방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이것을 힘으로 막기 위하여 외국에서 무사를 불러들여 감시하게 했다. 충신 소공(召公)이 간절하게 만류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물이 막혔다 터지면 분명 다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백성의 입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옳은 말을 듣지 않고 충신을 멀리하니 3년이 채 안 되어 백성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여왕을 쳤다. 이것이 중국역사 최초의 민중봉기다. 여왕은 체(彘)로 도망갔다.

여왕의 태자 정(靜)이 소공의 집에 숨어 있는데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드디어 포위했다.

“내가 그렇게 간언을 했지만 여왕이 듣지 않아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다. 내가 태자를 내주면 성난 백성들이 죽일 텐데, 그렇게 되면 여왕은 내가 그를 원망해서 태자를 내준 것으로 알 것이다. 충신이라면 끝까지 충성을 다해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위장시켜 내주었다.

여왕이 외국으로 도망가 14년 만에 죽었다. 소공은 자기 집에 숨어 있던 태자를 옹립하여 황제로 세우니, 이 사람이 바로 선왕(宣王)이다. 임금이 공석 중에 재상들이 협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14년간을 공화(共和)라고 하는데 공화가 시작되는 첫 해가 공화원년이다. 사마천이 쓴 「표(表)」에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를 보면 공화원년이 BC 841년이고 이를 연표의 시작으로 삼으니 이것이 길고도 먼 중국역사 연표의 시작이며 다음은 비교적 연표가 명확한 춘추전국시대로 이어진다.

1919년 신문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호적(胡適, 1891~1962) 같은 석학이 ‘중국고대철학사’를 춘추전국시대 이후부터 강의하는 파격적인 사건이 당시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고힐강(顧頡剛, 1893~1980)은 “고대사는 겹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화와 전설이 생긴 시대는 순서로 볼 때 고서에서 전승되는 시대 배열과 정반대이다.” 이 말은 중국의 고대사는 연대가 중복되고 정확하지 않으니 고대사를 미화하지 말고, 또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문왕 등이 살던 시대가 황금세계라는 관념을 타파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종전까지 이어져 내려온 역사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백년 전후로 해서 계속해 많은 훌륭한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역사적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진옥(羅振玉, 1866~1940), 왕국유(王國維, 1877~1927), 양사영(梁思永, 1904~1954), 동작빈(董作賓, 1895~1963) 같은 헌신적인 학자들은 은허(殷墟) 발굴, 채도(彩陶)로 유명한 앙소문화(仰韶文化), 갑골문자(甲骨文字) 등 수 많은 성공적인 발굴을 통해 은(殷, B.C. 1600~B.C.1046)나라의 실체까지는 인정할 수 있으나 하(夏)나라 이전은 전설의 시대로 미루었다. 이 근래에 들어와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라는 기치를 들고 중국의 역사, 문명 연대를 정리하기 위해서 1996년 5월부터 2000년 11월까지 4년 6개월 동안 수많은 석학들이 모여 연구한 성과는 안개 속에 묻혀 있던 하·상·주 역사의 실체를 밝혀낸 것이다.

기존의 믿을 수 있는 기년은 앞에서 말한 『사기』 「십이제후연표」에 따라 서주공화 1년이 기원전 841년이었으나 공정(工程)의 성과에 따라 중국역사의 기년이 1129년이나 앞당겨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안개 속에 가려져있던 하나라의 역사를 기원전 2070년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2070-841=1129) 이렇게 되어도 중국의 역사는 기원전 2070년 그리고 한국의 역사는 기원전 2333년에 시작된다. 이것은 중국보다 우리 역사가 263년이나 앞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이 5천년의 역사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발해, 신라, 백제 등의 역사로 2천여 년은 채울 수 있다지만 여기서 또 단군까지의 2천여 년은 무엇으로 메울까! 중국은 엄청난 자료와 시간 그리고 인력을 동원하여 역사를 점차 발전시켜가고 있는데 일제 질곡에서 벗어난 지 70주년을 맞이하면서도 우리는 그저 말로만 한국의 역사 5천 년 타령만 할 것인가!

내몽고 동남부 적봉시(赤峰市, 과거의 이름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열하’) 동북쪽 교외에 있는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紅山文化)는 1980년대 이래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이곳에서 기원전 3500년 전의 제단, 옥기, 적석총, 사람의 3배나 되는 여신상 등이 나타났다. 이것이 학술적으로 공인된다면 하나라(기원전 2070년 건국)에서 약 1500여년이 당겨진다. 이렇게 되면 이라크 문명, 이집트 문명보다 앞서게 되어 동아시아에서는 황제(黃帝)를 비롯한 오제(五帝)가 너희들은 나의 후손이라고 소리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중국문명은 황하, 장강유역에서만 발생하였다고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주장해 왔는데 몽골, 랴오닝성(遼寧省)은 오랑캐 및 동아시아 소수민족의 영역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2015년 7월 8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