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사직지신(社稷之臣)

  • 날짜
    2015-04-14 16: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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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BC 770~BC 221)를 사상과 행동으로 태양처럼 밝힌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보통 제(薺)나라 재상이었던 관중(管仲, ?~BC 645)으로부터 시작한다. 관중의 저서 『관자(管子)』 「목민(牧民)」 편에 “창고가 가득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주가 충족하면 영광과 치욕을 안다(倉廩實 則知禮節 衣食足 則知榮辱).”, “정치가 흥하는 것은 민심을 따르는 데 있고 정치가 피폐해지는 것은 민심을 거스르는 데 있다(政治所興 在順民心 政治所廢 在逆民心).”는 말이 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지배층이 서민층의 경제의식과 힘 있는 사람들에게 끌려오기만 했던 민초들의 힘을 인정하는 시각이었다. 이러한 관중의 실용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두면서도 여민동락(與民同樂)의 공동체를 실현해온 명재상 안영(晏嬰, ?~?)에 대해 알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관중의 현장정치에서 출발해 사직(社稷)으로 발전시키고 “뭇사람의 세론(世論)은 쇠도 녹인다는 중구삭금(衆口鑠金),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강남종귤 강북위지(江南種橘 江北爲枳)” 같은 촌철살인의 해학과 어려운 난관을 대치하는 순간적인 슬기에 대해선 누구도 안영을 따를 수 없다.

임금은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누린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항시 불쌍하게 생각하는 데서 정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맹자가 주장한 글이지만 안영의 어록을 담은 『안영 춘추(晏子春秋)』를 살펴보면 사실 맹자보다 250여 년 앞서 안영이 글과 행동으로 먼저 실천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름과 장소만 다를 뿐 사상과 행동이 이리도 똑같을 수 있을까! 사람을 놀라게 한다. 임금과 나라[社稷]를 구분하는 안영의 자세와 당시로서는 초목보다 나을 것 없는 하찮은 백성의 생명까지 귀하게 여기는 사례들을 보면 절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경공이 유난히 말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사서(史書)』 여러 곳에서 많이 보이는데 산둥성 제나라 고도(古都) 임치(臨緇)에는 이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순마갱(殉馬坑)이 1982년에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6백여 필의 말이 순장되었으리라 추정하지만 현재는 106필만 발굴해서 전시하고 있다. 「내편간상(內篇諫上)」에 안영이 일개 서민의 생명까지 아끼는 마음과 기지가 엿보이는 내용이 있다. 말을 미친 듯이 아끼는 경공이 어인(圉人, 말을 기르는 사람)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돌보도록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병들어 죽고 말았다. 화가 난 경공은 어인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안영은 경공에게 “죽일 때 죽이더라도 죄인이 죽는 이유를 알도록 제가 문초를 하겠다.” 하니 경공이 승낙했다. 안영이 추상같은 어조로 죄인에게 “너의 죄는 세 가지가 있다. 임금께서 너에게 말을 기르도록 했는데 너는 이를 죽게 했으니 첫 번째 죽을죄가 된다. 또 임금께서 가장 아끼는 말을 죽게 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에 해당한다. 그리고 너는 왕이 말 한 필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나라 안의 모든 사람과 나라 밖 제후들이 우리 왕을 인정머리 없는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니 이것이 너의 세 번째 죽을죄가 된다. 그러므로 네 목숨을 거두겠다.” 안영의 판결을 듣던 경공은 깜짝 놀라 탄식하면서 죄인을 어서 풀어주라고 했다. 안영의 재치가 사람을 살린 것이다.

『안영 춘추』 「내편 잡상(內篇雜上)」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안영이 어느 날 경공을 모시고 있을 때 이른 아침이라 날이 추웠다. 경공(景公)이 안영에게 “따뜻한 음식을 가져다주시오.” 하고 청하자 “저는 임금께 식사를 갖다 바치는 신하가 아닙니다.” 경공이 다시 “그러면 갖옷 좀 가져다주시오.” 부탁하자 역시 “저는 임금께 자리나 깔아드리는 그런 신하가 아닙니다.”라고 하며 냉정히 거절했다. 그러자 경공이 “그러면 선생은 과인에게 있어서 뭘 하는 사람입니까?” 묻자 “저는 사직지신(社稷之臣)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경공이 “무엇을 사직지신이라 하는 것입니까?”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물었다. 그제야 안영 는 “무릇 사직지신이란 나라를 세워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큰 임무를 지닌 신하로서 상하의 직위를 구별하고 그 이치에 맞게 부려서 백관의 질서를 제정합니다. 또 나라의 위엄을 세워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이후 임금은 예가 아닌 경우로 안영을 불러 일을 시키는 일이 없었다. 안영은 이미 오래 전에 군자(신하, 관료, 지식인)는 군주를 위해 충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라는 공적기구인 사직을 위해 일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백성과 함께 나라를 위한 일꾼이지 임금 개인의 사병이나 노예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놀랍고 과감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기(史記)』를 완성한 사마천(司馬遷, BC 141~BC 86)이 사기열전(史記列傳) 「관안(管晏)」 편에 남긴 기록을 보면 “오늘날 안영이 살아있어 내가 그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흠모한다(假令 晏生在世, 己雖與之為僕隸, 為之執鞭 亦所忻慕)”고 했다. 사마천이 누구인가! 52만 6천 5백여 자로 채워진 방대한 사기는 사마천이 40대 초반에 시작해서 50대 중반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죄 없는 젊은 장수 이능(李陵, ?~?)을 변호하다가 한 무제(漢武帝, BC 156~BC 87)에게 미움을 받아 49세에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고 3년간 감옥생활을 한다. 자살을 여러 번 생각했지만 궁내의 내시로서 생을 유지하면서도 마침내 『사기』를 완성한다. 파도 같은 열정, 식견 높은 정의감, 약자에 대한 깊은 배려, 분노를 삭히는 인내심, 인물을 꿰뚫어 보는 혁명적 안목 등을 두루 갖춘 인물이 극찬했던 안영,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임금 앞에서 임금 개인이 아닌 사직과 백성을 위한 신하를 자처했던 안영, 과연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는 안영 같은 사람이 없는가! 아니 그를 존경하는 사람조차 없는 것은 아닌가?

 

* 이 글은 인천일보 2015년 4월 8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