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중국몽(中國夢), 한국몽(韓國夢) -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서

  • 날짜
    2014-12-10 12: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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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얼문화재단 제26차 중국역사기행은 광둥성(廣東省) 북부 소관(韶關)을 비롯하여 영서봉림(英西峰林), 동천선경(洞天仙境), 광동대협곡(廣東大峽谷), 남화선사(南華禪寺), 단하산(丹霞山), 불산(佛山) 그리고 마카오(澳門)와 홍콩(香港) 공항을 거쳐 귀국하는 일정으로 꾸려졌다.

양안 통일의 초석을 놓는 강주아오대교(港珠澳大橋)
랴오닝성(遼寧省)의 작은 도시 티에링시(鐵嶺市)는 부동산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유령도시가 되어가고, 이러한 현상이 이곳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번에 광둥성 북부의 벽촌에 다다랐을 때 내가 본 광경은 새롭게 길을 포장하고, 관광 개발에 적극적으로 힘쓰는 건설 모습이 예전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특히 광저우 남쪽 지역에는 대형트럭들이 주하이(珠海)와 마카오·홍콩을 바쁘게 오가며 노동자들이 먼지와 뒤엉켜 씨름하며 열심히 일하는 강주아오대교(港珠澳大橋) 건설 공사 현장은 장관이었다. 강주아오대교는 홍콩과 주하이·마카오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해양대교로 총길이 50킬로미터에 해저터널만 6.7킬로미터, 인공섬 등 총공사비 RMB 720억(한화 13조)에 달하는 대공사로 2016년쯤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대교의 건설목적은 홍콩과 주하이·마카오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 지역은 중국 대운하의 남부 시발지이며 아편전쟁이 최초로 발발한 지역으로 운하무역과 해상무역의 근거지인 주강삼각지(珠江三角地)를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 중국 정부가 내걸고 있는 목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진짜 속내 중 하나는 과거 영국과 포르투갈이 백년 이상 지배했던 영토를 대륙의 품속으로 끌어안고, 대만과 양안 통일의 초석을 놓는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는 정치적 포석이자 선진적 비전이라는 사실이 부럽기 그지없다.

이 계획 자체는 1983년 중국계 홍콩 상인들에 의해 작성된 기획 문서를 바탕으로 중국 정부가 그동안 광둥성 내의 광저우(廣州), 선전(深圳), 주하이, 산터우(汕頭) 중산(中山), 퍼산(佛山) 등 여러 도시들이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고 실행에 옮긴 사업이라고 한다. 아무리 세계 최장의 해양대교를 건설하는 대규모 토목사업이라고 하지만, 경제·지리·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제대로 된 위치를 찾기 위해 30년이란 긴 세월을 검토하고 판단하여 대업을 일으키는 장기적인 안목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일이다.

황푸군관학교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광저우에서 주하이 강을 건너면 황푸장주도(黃埔長州島)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곳에서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처음 문을 열었다. 중국 곳곳에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공부하고, 장차 중국혁명군의 초석이 되었던 곳이다. 우리가 특별히 이곳을 찾아간 이유는 상해임시정부 요인의 추천으로 입학한 한국 청년들 때문이었다. 비록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지만 현재까지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던 것으로 밝혀진 우리나라 사람만 해도 130여 명에 이른다. 피 끓는 가슴과 조국해방에 대한 일념으로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입학을 원한 사람들의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이 청년들 가운데 많은 수가 조선과 중국의 이중국적을 소지한 사람들이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으며, 주소 역시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으로 기재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신상파악이 퍽 어려운 상황이다.

이 학교 4기 생인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은 황푸군관학교 교장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만나 한국인의 입학 및 학비 면제를 약속받았다. 한국인 학생과 교관들은 혁명군인회(革命軍人會)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교장 장제스의 양해 하에 광둥·우한 지역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노령 지역을 무대로 비밀리에 입교생 모집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장제스 일기에 따르면 초기 6개월 정도의 과정만을 거친 학생들이 전선에 나가 그중 반 이상이 전사했다고 가슴 아파하는 기록이 있으니 그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은 또 얼마나 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거룩하면서도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군관학교 학생들보다 개인자격으로 북벌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더욱더 많았다. 그런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가 광저우시 웨슈(粤秀)공원에 있지만, 국내에는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국공(國共)양당의 뿌리는 하나, 황푸군관학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 소련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위기를 느낀 소비에트 정권은 강대국으로부터 고통 받던 인접 국가들과의 제휴를 모색하면서 1918년 7월 25일 대중국선언(對中國宣言)을 발표했다. “러시아제국 시절 중국과 체결한 모든 불평등조약을 파기하고 만주를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취했던 이권을 일괄적으로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선언서였지만, 이것이 중국에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감격하였고, 중국 대륙에 대대적인 친소(親蘇) 바람이 불어 닥쳐 대학마다 경쟁하듯 러시아학과와 관련 연구기관들이 개설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코민테른이 보낸 네덜란드 출신 마린(馬林)의 도움을 받아 1921년 6월 전국에서 온 대표 13인이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마린은 자신이 조력해서 성립된 중국공산당에 실망하였다. 그는 본부에 “중국공산당은 학술단체이지 정당이 아니다. 당원도 오륙십 명밖에 안 된다. 모였다하면 말싸움으로 시간만 허비할 뿐 5개월이 지나도 결과물이 하나도 없다”고 보고했다. 마린은 중국공산당 보다 오히려 쑨원(孫文, 1866~1925)이 이끈 국민당에 기대를 품었다. 한편 중국공산당 초대 서기로 선출된 천두슈(陳獨秀, 1879~1942)는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금 지원도 거절하면서 “내가 서기를 그만둘지언정 코민테른이라는 모자를 쓰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마린과 천두슈는 초기부터 갈등이 심했다.

쑨원은 1922년 6월 한때 자신의 지지자였던 광둥 군벌 천지옹밍(陳炯明, 1878~1933)의 반란으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졌다. 쑨원은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광저우를 탈출해 상하이로 갈 수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국민당에 충성스러운 군대가 없는 한 혁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평소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제도는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쑨원이지만,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성사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군대 양성을 위해 소련의 지원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당시 30대 초반의 장제스는 쑨원의 친소련 정책에 시종일관 반대했지만, 쑨원은 깊은 뜻이 있어 장제스에게 소련시찰단 단장의 중임을 맡겼다.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3개월간 소련에 머물게 된 장제스는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은 것은 물론 많은 환영과 유혹을 받았으나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것 외에는 없다”며 공산당 입당을 끝내 거절했다. 돌아온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의 초대교장이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来, 1898~1976)는 국민당 군복을 입고 정치부 주임으로 그를 보좌했다.

쑨원의 국공합작 덕분에 중국근대화 과정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청년들이 모여 하나가 된 이 학교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부의 추천서만 있다면 누구라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모두 합격할 수 있었다. 오늘날 국공양당의 뿌리는 하나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 학교 출신 젊은이들이 모두 훗날 국민당과 공산당을 이끄는 핵심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제스가 교장으로 활동한 지 반 년도 안 되어 쑨원 다음의 국민당 실력자이자 국민당 내 좌파의 지도자였던 랴오중카이(廖仲愷, 1876~1925)가 암살당했고, 암으로 투병하던 쑨원마저 그 뒤 6개월 만에 서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야흐로 장제스의 천하가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의 꿈은 어디에 있는가?
십여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건물이 낡고 썰렁하여 방문객도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 찾았을 때는 찾는 사람들도 많아서 활기차고 건물에도 윤기가 돌았다. 학교 입구에는 시진핑 주석의 사진과 함께 ‘중국몽(中國夢) 강군몽(强軍夢)’이란 표어가 커다란 간판으로 걸려 있었다. 중국의 꿈(차이나드림)은 군사적 강국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동서양의 군사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힘든 처지가 된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로 왕조가 바뀔 때도 어려웠지만, 명에서 청(淸)으로 이어질 때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무능으로 병자호란까지 자초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한국의 앞날에 불어 닥칠 동아시아의 파고가 험난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안에 들어가니 관광객들이 쑨원이 1925년 서거할 때 남긴 유훈 “혁명은 아직 성공한 것이 아니다.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라(革命尙未成功 同志仍須努力)!”라는 글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 수많은 학생과 단체들이 이곳에서 기숙하면서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공부하는 체험학습이 유행처럼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때 천하관(天下觀)에 젖어 우습게 보았던 오랑캐 영국과 일본에게 패배했던 이유를 이곳에서 곱씹어보기 위한 것이리라 생각해보았다. 바로 이곳이 국공합작의 상징물이자 혁명의 불길을 올린 봉화터라고 생각한다면 황푸군관학교는 중국혁명정신의 성지이기도 하리라.

조선의 석가와 조선의 공자를 고민하라
돌아 나오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남의 나라를 위해 도와주고 희생할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은 어렵더라도 남북이 서로 대화의 물꼬라도 트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앞선다. 이렇게 가슴이 꽉 막힐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글이 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9) 선생은 1925년 <동아일보>에 실린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이란 글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우리 조선은 (…)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민족의 앞날에 닥쳐올 고난이 눈앞에 불처럼 명약관화해지고 있는 이때, ‘석가의 조선, 공자의 조선, 주의의 조선’이 아닌 ‘조선의 석가와 조선의 공자, 조선의 주의’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지도자와 시민은 없는 것일까.

* 이 칼럼은 2014년 12월 10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