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내 이웃이 평생의 책이다

  • 날짜
    2014-09-19 15:12:25
  • 조회수
    807

“어떤 책을 읽어야 좋을까요? 당신의 생애에 길잡이가 된 책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단 한 권의 책을 권한다면 어떤 책을 추천하시겠습니까?”와 같은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에 상응하는 좋은 답을 준 적이 거의 없다.

책을 왜 읽어야 하나? 폭넓은 지식욕을 충족시키고 그 성취감을 위한 것이라면 컴퓨터나 컴퓨터 축소판인 스마트폰을 잘 활용할 줄 아는 기술만 있으면 충분하다. 책을 많이 읽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명성을 얻어 이에 따르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라면 더 더욱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 중에도 거만금의 재산을 쌓은 사람도 많고, 대학을 나온 후에는 책하고 단절하고 사는 사람들 중에도 저명인사가 되어 장관·국회의원·재력가 그리고 선출직에 당선된 사람들을 수없이 보게 된다.

이데올로기·사조·철학을 읽고 잘 정리하여 암기한다고 해서 자랑할 만한 것도 못된다. 도서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읽어 달라고 기다리는 고전에는 동서양 지식의 보고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이런 귀한 책들도 이제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그대로 옮겨져 검색하는 기술만 가지고 있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다. 때로 성취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토막지식이 학문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절실함에서 깨우친 상식에 미치지 못하고, 서로 연결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논어(論語)』 첫 장 첫 줄에 나오는 글은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종지(宗指)와 같은 글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삶에서 제때에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책을 읽고 배운다는 것은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하며 그 속에서 얻은 지식이 내 삶에서 적용되어 슬기로 돋아난다면 이것이 진정한 학문이요, 배움이 아니겠는가. 독서라고 다 같은 독서가 아니다. 읽어 즐거움이 없다면 어떻게 지루하기만 한 긴 시간을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으며 또 즐거움이 없으면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정곡(正鵠)을 찾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책을 보고 읽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책과 지속적으로 가까이 할 수 없다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나와서 책을 계속해서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종이로 된 책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책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람마다 그 얼굴, 행동, 살아온 과거 그리고 오늘 그 사람의 생활을 살필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이보다 더 귀한 책이 어디에 있겠는가.

1918년 중국 절강성에서 태어나 얼마 전(2012년) 95세를 일기로 작고한 세계적 대석학 남회근(南懷瑾)의 다음과 같은 글이 마음에 꽂힌다.

“학문은 문자도 아니고 지식도 아닙니다. 학문은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행동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학문을 닦는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생활하는 가운데 마주치는 모든 것이 책이며 공부인 것입니다.”

지난 7월 서울을 다녀간 중국공산당 주석 시진핑(習近平)이 외교적 수사로 “백금을 주고 집을 사고, 천금을 주고 이웃을 사며 큰돈을 준다 해도 좋은 이웃과는 바꿀 수 없다(百金買屋, 千金買隣, 好隣居金不換)”라고 했다. 자신과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좋고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신은 항시 좋고 훌륭한 책을 읽고 사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지식이 행동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화석화되어 있으며 쓸모없는 종이 쪽지요, 악취 풍기는 고인 물에 불과하다. 자기가 아는 만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지식과 학문의 생명이다.

생명 없는 지식과 학문은 자신을 나태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드는 기초가 된다. 2천 3백여 년 전에 저술된 순자(荀子, BC298~BC238)의 「유효(儒效)」편에 나오는 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듣지 못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좋다. 듣는 것보다는 그것을 보는 것이 좋다. 보는 것보다는 그것을 아는 것이 좋다. 아는 것보다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좋다. 학문을 실천할 때에 이르러야 종착점에 다다른다. 실천해야만 분명해지며 분명해지면 성인이 된다. 성인은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삼고 시비를 합당하게 가지며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터럭만한 어긋남도 없다. 거기에는 별다른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실천하는 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지식·학문·지식인은 높은 산정에 잠시 머무르는 구름과 같으며 바른 삶을 실천에 옮기면 도처에서 책이 내 가슴으로, 머리로 오게 되어 있으므로 힘들게 어떤 책을 읽을까 묻지 않아도 된다. 말과 지식은 넘쳐나고, 검색은 있으되 사색은 없는 시대, 오직 행동만이 귀한 것이며 책과 지식은 그 다음의 일이다.

* 이 글은 2014년 9월 17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