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기도를 잃은 사회

  • 날짜
    2014-07-10 10: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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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경건(敬虔)한 마음에 스스로 엄숙해진다. 하늘이나 신과 통하고 싶어 갈망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당이나 성전에 앉아 기도한다고 모든 뜻이 성취될까?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기도의 형식을 취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기도는 아니다. 참으로 절실하게 갈구하고 또 마음속깊이 죽음도 불사한다는 의지와 진실성의 절규(絶叫)가 아니라면 기도는 의식(儀式)일 뿐 기도가 아니다.

우리가 절망에 처해서 ‘어머니!’를 길게 외치며 통곡할 때, 예수님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신음할 때, 이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빠진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두 손 모아 엎드려 절하고 기도한다고 뜻이 이루어진다면 기도의 진실에서 너무나 먼 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의 낙산사(洛山寺)에서 아래로 내려와 풍광이 아름다운 의상대(義湘臺)에 올라 바다를 보면서 왼쪽 아래 끝자락에 저 멀리 홍련암(紅蓮庵)이 보인다.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면 홍련암 주위가 아니었을까? 평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의상은 관세음보살이 계신 곳(Potalaka)에서 친견을 못한다면 목숨을 바다에 던지겠노라는 굳은 결심을 품고 밤낮으로 기도한 끝에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쯤 되면 기도라 할 수 있으리라.

한때 성철(性徹, 1912 ~ 1993)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부처님 앞에서 삼천 배를 한 뒤에 찾아오라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나는 별스런 스님도 다 계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면 스님은 암자에 갇혀 지내는 늙은 중을 찾기 전에 부처 앞에 가서 정성 드려 삼천 번 절을 올리면 내 안의 부처도 만날 수 있고, 희망도 찾을 수 있고, 마음에 안정도 얻을 수 있으리란 깊은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는 지금 기도하고 있는가! 돈과 권력과 진영 논리에 갇혀 겉모양만 기도의 모양을 갖췄을 뿐 신과 진실의 위상에 흠집만 내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기도는 무엇인가? 통일운동도 힘을 잃어가고 도덕성 회복도 땅에 떨어졌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공동체의 해체에서 오는 사회의 싸늘한 분위기다. 지금 우리는 OECD 국가들 중 몇 년째 계속해서 자살률 1위, 이혼율 1위, 행복지수는 맨 끝자락을 지키고 있으며 가계부채는 천조 원이 넘는데도 부채가 점점 늘어 위험수위에 와 있다고 전문기관은 발표하고 있다. 빈부격차는 나날이 심화되어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전방 GOP에서 벌어진 임 병장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알려진 이른바 관심사병의 비율이 전체 병사들 가운데 4%나 된다는 충격적인 보고도 있었다. 진도 앞바다 참사는 3개월이 가까워도 시민과 유가족이 바라는 진실규명과 재발방지가 요원하다.

열강들의 국제관계는 구한말을 닮아가고 있다고 학자들마다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살피다보면 한국은 위기에 처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 환경과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기백과 끈기가 있는 민족이다. 다만, 이 근래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을 잃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우리는 근본으로 회귀해야만 한다. 이윤에만 매달리지 말고, 인간적인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근본이라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노라면, 일개 장사꾼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가 어떻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는지 그 뿌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이윤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판다”고 했다. 이윤은 돈과 거래에 한정되지만 가치는 인간에게만 내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에덴동산의 열매를 한 입 베어 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 28장에는 “人能弘道 非道弘人(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는 있어도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글이 있다. 공자는 이 글 하나로 인문학의 위대한 성인이 되었다. 모든 것, 무상(無上)의 중심 가치가 사람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인(人)이라 하지 않고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나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넓혀가는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생명과 삶의 내용이다.

사람이 중심에 없는 돈, 권력, 학문 그리고 제도와 결별할 때가 된 것이다. 시대의 사명과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자신의 사명을 설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떠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고, 후손에게 무거운 짐을 넘기는 죄인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잊지 않아야 한다.

“獲罪於天 無所禱也(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다)” <『논어』 팔일(八佾)편 13장>

 

* 이 글은 인천일보 2014년 7월 9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