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우리 겨레의 얼을 재발견한 우현 고유섭

  • 날짜
    2013-11-04 16: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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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새얼역사기행은 영양(英陽), 울진(蔚珍), 경주(慶州)의 천년 유적을 찾아보는 일정이었습니다. 천년의 신라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돌의 문화이고 곧이어 5천 년 전 이집트 사람들이 만든 카이로 기자(Giza)에 있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누비아(Nubia)의 아부심벨 신전(Abu Simbel Temple), 룩소르(Luxor)의 돌기둥으로 상징되는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의 장대한 규모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만약 이처럼 거대한 석조문화가 없었다면 훗날 유럽 제국의 식민지가 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누가 인정하려 했을까요? 지금도 이집트 문명(Egyptian civilization)이라고 말하는 대신 강 이름을 따서 나일 문명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듬어 놓은 석조문화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라는 것을 남들에게 실증하기에 더 어려웠을 겁니다.

석굴암을 발견했다는 일제에 저항한 우현 고유섭
경주를 한두 차례 가본 것은 아니지만 경주에 갈 때마다 어떤 순서로 볼 것인지 마음속에 정해놓은 곳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선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상을 찾고, 감은사지와 대왕암 그리고 경주 오릉(五陵) 등 세 곳을 차례로 보고 난 뒤에야 다음 일정을 정하곤 합니다. 토함산 정상 부근의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 오르다보면 길 오른쪽으로 검은 돌비석 하나가 서 있습니다. 비문에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잊어서는 안 될 작품으로 경주 석굴암의 불상을 갖고 있다.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보물은 이 석굴암의 불상이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은 우리 민족이 아직 일제의 억압 속에 놓여 있던 1930년대 초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선생이 저술한 『신라의 조각과 미술』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우리에겐 석굴암이 있다며 석굴암의 존재와 그 가치를 이처럼 강조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인도의 아잔타 석굴(Ajanta Caves)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넝쿨 속에 잠들어 있던 것이 1819년 호랑이를 사냥하던 영국인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을 찾았던 프랑스 박물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일제는 그런 이유에서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석굴암의 존재와 가치도 모르는 채 방치해둔 무지몽매한 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토함산은 경주 인근에 있는 산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조선시대였던 1703년과 1891년에 석굴암을 보수했다는 문헌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제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 민족 문화의 정수이자 신라 천년의 상징인 석굴암의 존재조차 모르던 것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일본인들이 해체하고, 복원하여 재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양 문화예술의 중심이 일본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논거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이 바로 우현 고유섭 선생이었습니다.

자연 석굴이 아니라 석조 건축물인 석굴암
진리가 바로 미(美)이듯 관념적으로 완전한 것이 미술에 있어서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납니다. 불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운 신체 표현을 통해 불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불상은 깨달은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라의 장인들은 종교적 열정과 예술정신을 불사르며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땀을 흘려 이루어낸 것이 석굴암 불상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우리의 예술정신과 창조성으로 바로잡아 토대를 세운 사람이 우현 선생입니다.

세계에는 많은 불상이 있고, 석굴 역시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석굴암을 생각할 때 기억해두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중국과 인도의 석굴들은 연한 재질의 암석산을 파내어 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지만, 경주 석굴암은 외부에서 석재를 운반해 이곳에서 인위적으로 다듬은 돌과 석판을 조립하여 만들어낸 것이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중국과 인도의 석굴이 말 그대로 석굴이라면 우리의 석굴암은 석조 건축물입니다. 이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석굴 건축물 내부에 과학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조성된 불상을 배치한 곳은 전 세계를 통틀어 오로지 석굴암 한 곳뿐입니다.

또, 서양의 조각상을 바라보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형체에, 옷의 주름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실제로 옷을 입은 것처럼 섬세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경탄합니다. 그러나 서양의 조각상들은 대부분 재질이 연한 대리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대리석이란 석회석의 일종으로 구성 성분도 거의 같지만 다만 경도가 조금 높을 뿐입니다. 물론,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 조각의 예술성이 낮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작의 어려움을 생각해본다면 대리석의 연한 재질은 화강암의 단단함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석굴암과 그 안의 불상은 모두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화강암은 경도가 높고, 재질의 결이 민감해 조각에 이용하기엔 매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무리 단계에서 예기치 못한 일로 결이 떨어져나간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석굴암 불상은 보면 볼수록 그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 사람의 글재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토함산이 토해낸 신라의 석조건축물들
토함산(吐含山)의 한자어 뜻을 살펴보면 ‘머금었던 것을 크게 토해내는 산’이란 뜻입니다. 토함산이 품고 있다가 토해낸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석굴암,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 연화교와 칠보교, 청운교와 백운교로 연결되는 석조건축물 그리고 감은사지 쌍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이 이미 재인(才人)을 이 땅에 내린지라 어찌 한 개의 작품으로 조화를 보였으랴”라고 우현 선생은 『신라 탑파 미술』에서 말한 바 있지 않습니까! 토함산 석굴 밑에서 동해 쪽으로 내려다보면 감은사지 쌍탑과 감포 앞바다 대왕암이 마음으로 보일 듯합니다.

중국의 전탑(塼塔), 일본은 목탑(木塔), 한국은 석탑(石塔)이라고 정형화되어 있으나 삼국 시대 초기 우리 탑파의 발전 양상을 보면 목탑, 모전석탑(模塼石塔), 전탑, 석탑 순으로 새롭고 아름다우며 창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감은사지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진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이 되는 석탑입니다.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처럼 백제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재료가 석재일 뿐 전체적으로 목조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목조구조를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은 감은사지 석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와 우현 고유섭
감은사지 석탑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점에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 문무왕편에 따르면 “삼국을 통일한 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에 열반했는데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내라고 유조를 내렸다. 왕은 평소 늘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짐은 죽은 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높이 받들면서 나라를 지키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감포 앞바다 바위섬에 대왕의 시신을 다비해 장례를 지내니 이것이 곧 오늘날의 대왕암입니다.

감포 앞바다 입구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기념비에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고유섭”이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또 그 옆에는 우현 선생의 자작시 「대왕암」도 새겨져 있습니다. 「대왕암」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왕의 우국성령은
소신(燒身) 후 용왕되사
저 바위 길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敵鬼)를 조복(調伏)하시고

나라를 생각하는 의지와 꿈이 하늘을 찌르고 짐승의 응보(應報)가 용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 용이 되어 왜구를 지키겠다는 일념은 천하의 그 어떤 위정자의 모습과도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감은사(感恩寺)는 대왕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가 동해의 용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과 통일대업을 완성한 업적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 감은사터를 발굴할 때 문무대왕이 밤이면 금당 아래로 들어와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왕암에서 밤이면 대종천(大鐘川)을 타고 들어와 법문을 듣는 대왕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러나 문헌에는 다만 경주시 능지탑이 대왕을 화장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 당시에는 누구도 왕릉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현 선생은 『삼국유사』에서 지적한 동해 한가운데 있는 바위를 얼마나 오매불망 찾았을까요. 드디어 이곳이 대왕암임을 느끼고 찾았을 때, 당시의 감격을 후학들이 선생의 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에 새겨 비석으로 대신 전하고 있습니다. 일제 36년 탄압기 동안 대왕암을 찾아 헤매는 우현 선생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떠올려보면 일본에 맞서 우리의 얼을 다시 찾아 세우려고 하는 그 모습이 한없이 처절하고, 거룩하여 웅장해 보입니다.

저는 이처럼 대왕암, 감은사지 석탑과 석굴암을 비롯한 경주의 석조물들 앞에 서면 항시 우현 고유섭 선생이 생각나고, 그 분의 뜻을 이어 발전시킨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같은 걸출한 제자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샘솟습니다. 그리고 인천시립박물관에 우현 고유섭 선생의 동상을 건립한 새얼문화재단과 우리 인천 시민들의 정성어린 뜻이 고맙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동상제막식 날 동상 앞에서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가 된 제자 황수영 선생의 축사 속에는 선생님의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기억하고, 동상을 건립해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 제자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말씀하시며 눈물 흘리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탑 앞에 서면 먼저 탑파연구의 개척자인 우현 선생을 생각하고, 그 다음 우리 인천을 생각합니다. 우리 인천이 우현 고유섭 선생 같이 걸출한 인물들을 수없이 배출한 고장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보다 더 훌륭한 후학들이 앞으로도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
앞서 위정자로서 죽어서도 나라를 생각한 문무대왕을 이야기했습니다만 경주 오릉(五陵)을 찾을 때마다 저는 이곳이 임금의 능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습니다. 경주 오릉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네 분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다섯 분을 모신 능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의 무덤이라고 되어 있는데 2천 년 전의 일이라 누구의 무덤인지 정확히 단언하기 어려우며, 그 시비를 따지기 어렵지만 그보다는 오릉의 조형미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저는 이곳을 찾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 진시황의 병마용 등 이름난 제국의 장대한 능들은 겉보기엔 웅장하고 위대해보이지만 그것들이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 생명을 빼앗는 끔찍한 노역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무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오릉의 봉분은 멀리서 보면 마치 어느 여인의 봉긋한 젖가슴처럼 소담하고 예쁘기만 합니다. 오릉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천년, 2천년이 넘는 세월 속에 이곳 오릉이 평지가 되지 않도록 우리 후손들이 길이길이 갈고 다듬어 주위 환경과 함께 어우러져 오늘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곳을 조성한 우리 조상들의 심미안과 정성에도 박수와 경의를 보내고 싶지만 동시에 이곳을 잘 보전해온 그 공로에도 또한 경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