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부형청죄(負荊請罪)

  • 날짜
    2021-12-15 08:24:56
  • 조회수
    635


공자가 존경하여 충절의 상징으로 모셨던 백이숙제(伯夷叔齊) 형제가 수양산(首陽山) 기슭에서 굶어 죽은 것과 공자의 애제자이며 학문의 곧은길을 행하면서도 빛을 못 보고 어렵게 생활한 안연(BC521~BC481)이 먼저 요절한 것을 두고 사마천(司馬遷, BC135~BC86?)은 통탄하며 <사기(史記)> '열전(列傳)'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근래에 사례를 보면 하는 일이 정도를 벗어나고 법령이 금하는 일을 일삼는 데도 편히 즐기며 그 부귀가 대대로 이어지는 자가 있다. 반면 걸을 때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할 때도 때를 기다려 하고 길을 갈 때도 옆길로 가지 않고 일할 때도 공정하지 않으면 분발하지 않는 데도 재앙을 만나는 자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것이 이른바 천도(天道)라면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

2000여 년 전의 글이지만 하늘을 우러러 외치는 사마천의 피맺힌 절규가 지금까지도 뜻있는 사람의 가슴에 파도친다. 오늘의 어떤 글보다도 현실감각이 돋보인다. 각박한 현실의 고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할 수 있다. 그러나 <노자(老子)> 79장에 “天道無親 常與善人(천도무친 상여선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늘의 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있지만 항시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온다”는 뜻이다. 현실이 아무리 얽히고설키어 세상이 혼돈에 빠진 듯해도 '가장 큰 파산은 절망이고 가장 큰 자산은 희망'이라는 속담이 있다. 어려움을 참는 것은 미래를 내 것으로 할 힘과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온 세상이 부패하고 썩은 냄새가 진동해도 꽃은 때가 되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장마가 하늘을 두껍게 덮어도 푸른 하늘은 언제나 태양과 함께 세상을 비추는 법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자연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배워야 깨어날 수 있다. 내년 3월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시민을 단순히 표로 보지 말 것이며, 사람의 품격을 먼저 생각해 상대가 아무리 미워도 막말을 삼갔으면 한다. 막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밝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에 시민들 역시 귀중한 한 표를 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기열전> 염파와 인상여편에 '부형청죄(負荊請罪)'라는 말이 있다. 진(秦)나라 29대 소양왕(昭襄王, 재위 BC306~BC251)은 진시황의 증조부로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기초를 다져준 정복자였다. 어느 날 소양왕은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씨벽(和氏璧)이라는 보물과 진나라의 성읍(城邑) 15개를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화씨벽은 모든 왕이 탐내는 옥돌로 이를 가진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약소국이었던 조(趙)나라 혜문왕은 여러 대신과 상의했지만,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화씨벽을 진나라에 내주자니 강대국인 진나라가 성읍을 내어줄 리 만무했고, 안 주자니 이를 빌미로 진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려웠다.

나라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 문벌도 없고, 이름도 없던 인상여(藺相如)가 “갈 사람이 없다면 제가 가겠습니다”라며 자청해 호랑이굴로 향했다.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화씨벽을 진상했으나 진나라가 성읍을 내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담대한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 화씨벽을 되찾아 조나라로 무사히 돌려보냈다. “화씨벽이 무사히 조나라로 돌아왔다(完璧歸趙)”라는 고사성어에서 유래한 것이 지금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완벽(完璧)'이란 말이다.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인상여의 과감한 용기와 슬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상여의 사리가 분명한 말과 명분을 갖춘 논리 앞에서 진나라 소양왕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후 인상여는 혜문왕 곁에서 조나라를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해냈다.

왕은 그 공을 높이 평가해 인상여를 상경(上卿)에 임명했다. 그러자 귀족 출신으로 전쟁에 나가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운 장군 염파(廉頗)의 불만이 컸다. 그는 공공연하게 감히 천민출신이 내 윗자리에 앉다니 만나기만 하면 모욕을 주겠다며 단단히 별렀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회가 있을 때조차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인상여의 사인(舍人)들이 “염파가 악의로 상경을 겁 많고 비겁한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고 있는데 계속 피해 다니신다면 우리는 이만 하직하겠습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 인상여가 만류하며 “그대들은 염 장군과 진나라 왕 중 누가 더 무섭소?”라고 하자 사인들이 답했다. “당연히 염장군은 진나라 왕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자 인상여는 “나는 진나라 왕의 조정에 나아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왕을 질타하고 모욕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염 장군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소. 다만,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침공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약 지금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면 결국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 장군을 피하는 것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적인 원한을 뒤로 돌렸기 때문이라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감격해서 울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어깨를 드러내고, 가시나무 채찍을 등에 지고 나가 스스로 죄를 청하니 이를 부형청죄라고 말한다. 국가의 위기 앞에서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후 생사를 같이하여 서로를 위해 목을 내어줄 만큼 깊은 신뢰를 뜻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훗날 한 무제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당대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인상여의 높은 덕을 존경해 자신의 이름을 '상여'로 바꾼 것이다. 인상여와 염파가 조나라를 굳건히 지키는 동안엔 강대국 진나라도 감히 조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인상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염파는 진과의 국경인 장평(長平)을 견고하게 지켜 진나라 군대가 3년 동안 연이어 출병했어도 아무런 성과 없이 되돌아가게 하였다. 진나라는 조나라에 반간계를 걸어 염파를 해직하고 무능한 조괄(趙括)을 장수로 삼도록 했다.

염파가 물러나자 진나라는 장평을 공격했고, 결국 조나라가 패해 장병 40만 명이 생매장당하는 참혹한 대패를 겪었다. 이는 세계전쟁사상 단일전투에서 발생한 최대 사상자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후 조나라는 급속하게 쇠퇴했다.

한 해를 보내며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9) 선생의 말씀이 가슴을 적신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한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온 백성이여, 모든 시민이여, 깨어나라고 선생은 절규한다. 이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