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역사에서 지혜를 찾았던 세종

  • 날짜
    2020-07-06 09: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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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지혜를 찾았던 세종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군주(君主)를 성인(聖人)으로 만들어 유교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경연(經筵)이었다. 원래는 한()나라에서 황제에게 유교경전을 강의하던 관례에서 유래되었고, 이후 당()나라를 거쳐 경연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송()나라 때였으며 교재도 이때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이민족이 지배하던 원()나라 이후에는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어 그 기능이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예종(睿宗, 1079~1122) 때 처음으로 도입 되었으나 무신정권 때 폐지되는 등 활발하지 못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경연이 크게 진흥 되었다. 경연은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등 하루에 세 번이었고, 때에 따라 임시로 소집되는 경연도 있었다.

 

학문에 뜻이 없고, 적성에 맞지 않는 임금은 경연에 참석하는 것이 지루하거나 한없이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세조는 학문에 깊이는 있었으나 조카 단종을 폐위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연산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경연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하였다. 경연은 절대 권력을 가진 임금을 신료들이 길들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이 되어버린 유교 경전에서 근거를 찾아 제시하면서 임금에게 성군이 되기를 강요했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공허한 이론과 관념으로 임금을 옥죈 것이다. 당쟁이 심했을 때는 왕의 명령보다 자기가 속한 정파 영수의 말이 우선시 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경우 학문의 깊이나 자기주장이 약한 임금은 조정이 정파 간의 놀이터가 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이 된다.

 

세종은 태자가 되자마자 두 달 만에 즉위(1418, 22)했으니 준비된 왕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20여 년 동안 경연에 빠지지 않고 매번 참석했다.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다. 당시 경연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책은 송나라 때 유학자 진덕수(陳德秀, 1178~1235)가 당시 황제인 이종(理宗)을 위해서 저술한 방대한 대학연의(大學衍義). 대학연의사서삼경, 춘추좌씨전, 예기, 논어, 사기, 한서, 후한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등 방대한 중국의 고전과 역사서를 풀어 임금과 백성이 바르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왕들은 주로 이 책을 가까이 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4)는 철저한 무인으로서 곁에 책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대학연의만큼은 학자들과 함께 강독하기를 즐겼다는 구절이 나온다. 또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17세에 과거에 급제할 만큼 학문에 대한 기초가 튼튼했고, 임금에 오른 첫해에 시독관(侍讀官) 김과(金科)와 함께 대학연의를 읽었다는 기록도 있다. 같은 해 12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서(李舒, 1232~1410)가 사온 대학연의를 선물로 받고 기뻐했으며 이 글을 다 읽으니 이제야 학문의 공()을 알겠다.”며 흡족해했다. 세종 110월에 열린 첫 번째 경연에서도 대학연의를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