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거동궤 서동문(車同軌 書同文)

  • 날짜
    2020-03-16 10: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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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궤 서동문(車同軌 書同文)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동아시아의 보편문자가 한자였던 시절, 백성들은 수천 년을 문맹으로 살아야만 했다. 세종대왕은 우리 말소리를 쉽게 담을 수 있는 28자를 창제했다. 우리말과 거리가 먼 한자를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대부들은 민초들을 마음대로 통치해왔는데, 그것이 곧 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글자를 힘없고 천한 서민들에게 임금 스스로 알려주었다는 것은 궁궐을 드나들며 권력과 위세를 부려왔던 세력과 힘을 온 천하 사람들에게 고르게 나눠주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인가.

 

세종실록을 보면 생각보다 한글 창제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한글 창제의 중심에는 아마도 세종대왕이 신뢰할 수 있는 왕족(대군)과 신료 몇 사람이 중심이 되어 비공개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세종 25(1443) 47세의 임금이 1230일에 훈민정음 창제를 발표했다. 기록에는 언문(諺文)’훈민정음(訓民正音)’ 두 명칭이 동시에 등장한다. 언문은 일반 명칭으로 훈민정음은 특별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언문이란 말을 훈민정음의 낮춤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본뜻은 전하는 말이나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그대로 옮기어 적을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용비어천가”(처음에는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를 한글, 한문 혼용으로 펴내는 언해사업과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판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집현전 원로학자인 최만리(崔萬理, ?~1445)를 중심으로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최만리는 고려 때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렸던 최충(崔沖, 984~1068)12대손으로 집안대대로 벼슬해온 금수저 출신이다.

 

유교와 성리학은 고려 시대의 안향(安珦, 1234~1306)이 들여와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사립학교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우고 조선 명종(明宗, 15451567)이 사액(賜額)을 내려 국가가 인정한 학문과 사상으로 공인되어 조선의 뿌리가 되고 법의 근원이 되었다. 이후로도 도산(陶山), 옥산(玉山), 도동(道東)원을 비롯해 수많은 서원이 설립되어 조선의 임금보다 명나라 황제를 먼저 생각하고, 조선의 조상보다 중국의 공맹을 높이 받드는, 그리고 백성의 실생활보다 주자의 성리학을 우선하는 정신이 세종과 맞선 것이다.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문은 길지만 그 요지는 첫째, “천하의 수레는 그 궤도가 같고 책도 글자가 같다(車同軌 書同文)”는 것으로 조선은 중국의 글자와 예법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 둘째, 몽골, 서하, 여진, 일본, 티베트 등 오랑캐만이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으니 스스로 오랑캐의 길을 따른다. 셋째, 설총(薛聰, 신라 경덕왕 때 학자)이 만든 이두(吏讀)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나 언문은 이와 반대이며 한문과 성리학을 기피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넷째,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에 지나지 않아 학문과 정치에 해롭다. 다섯째, 백관의 여론을 듣지도 않고 갑자기 만들었다. 여섯째, 아전배들에게 갑자기 한글을 배우게 한 것 등이다.

 

한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다시 정리해보면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모화(慕華)사상에도 맞지 않고 실제 정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신하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도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그대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여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글에 위배된다고 하는데 설총의 이두도 음을 다르게 만든 것이 아닌가? 또 이두를 만든 본뜻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고 한 것이고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인데 설총은 옳다고 하고 내가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는 세종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으며 고독했을까! 가슴이 뜨거워진다.

 

세종의 큰 업적은 신분보다는 능력을 우선했다는 것이다. 세종 재위 32년 동안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463명인데, 이중에서 신분이 낮거나 불분명한 사람이 155(전체의 33.47%)이다. 예를 들면 1. 과거급제자의 성명을 기록한 방목(榜目)에 본관(本貫)이 없는 급제자, 2. 족보(族譜) 자체가 없는 급제자, 3. 족보에 가계가 보이지 않는 급제자, 4. 족보에 가계가 단절된 급제자, 5.시조가 된 급제자(족보가 없거나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어 스스로 가문의 시조가 된 사람), 6. 신원파악이 어려운 급제자 등(한영우, 과거, 출세의 사다리중에서)이었다.

 

서얼 출신으로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24년간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훌륭한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장영실(蔣英實) 역시 귀화한 중국인의 아들로서 관노였으나 천재성을 인정받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3품이 되었고, 안견(安堅)은 잡직 종6품으로 제한된 화원을 정4품으로 제수하고, 의원 노중례(盧重禮)는 당상관이 되었다. 고려말 위구르에서 귀화한 설송의 손자 설순(偰循)은 집현전 부제학에 올랐고, 야인 귀화인은 화살을 만들고 왜인 귀화인은 칼을 만들고 유구국 귀화인은 배를 만드는데 참여했다.

 

세종 시대 성리학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