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소부(邵溥)같은 사람

  • 날짜
    2008-08-11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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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4

소부(邵溥)같은 사람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니 물가도 따라 오르고 시민들은 허리가 휜다. 외교의 기본인 남북관계가 밝아야 세계열강과 바로 설 수 있는데 모든 것이 혼미하기만 하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시민들 스스로 헤쳐 나갈 방도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것은 화려한 이론이나 수치로는 설득력이 적을 뿐만 아니라 시민과 공감대를 같이 하기도 어렵다. 활로를 찾아내기 어려울수록 우리는 느긋하게 과거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체험했던 역사의 바다를 항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저마다 시대를 상징하는 말이 있다. 당(唐)나라는 성당(盛唐)이라 하고, 송나라는 부송(富宋)이라 불렀다. 부유한 송나라였지만 문약(文弱)에 빠진 나머지 국방력이 약했기 때문에 늘 이민족 요나라에 이어 금나라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1125년 금나라는 송나라의 수도, 지금의 개봉(開封)을 침탈하였고, 이것을 정강(靖康)의 변(變)이라 한다. 휘종(徽宗) 황제와 그의 아들 흠종(欽宗)을 비롯해 후비, 황자, 공주 등 도합 3,000여 명에 달하는 왕족과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 나라가 멸망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휘종과 그 아들 흠종은 금나라에게 끌려가 금의 발상지인 동북 오국성(五國城)에 유배되어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바로 그때 일어난 일이다. 수도 개봉을 점령한 금나라 장수는 송나라의 황실 친척들을 모조리 색출해 잡아가려고 했다. 송나라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 나라의 재건을 막기 위해서였다. 나라가 망할 때는 매국노가 넘쳐나는 법이다.

“종정사(宗正司)에는 황실의 족보가 모두 보관되어 있으니 그 족보만 손에 넣으면 황실 가족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잡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나라 장수는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도 그런 사실을 밀고한 배신자에게는 커다란 상금이 내려졌을 것이다. 

  지금도 개봉에 가면 종정사 건물은 없지만 그 터는 남아 역사의 순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종정사를 지키는 관리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소부(邵溥)라는 충직한 하급 관리 한 명만이 남아 황실 족보를 지키고 있었다. 금나라 장수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부는 황실족보를 두세 장 건너 한 장씩 찢어 화로에 던지며 탄식했다.

  “내가 힘이 없어 족보 전체를 태울 수는 없구나! 내 평생 한으로 남을 일이다.”

  기록에는 소부가 태운 족보가 3할은 된다고 한다. 소부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없앤 족보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과 더불어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 조구(趙構)는 장강을 넘어 남경을 거쳐 전전하다가 항주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곧 남송(南宋) 152년의 시작이다. 혼이 있는 공직자 한 사람의 덕분이었다. 송나라가 남북으로 존립하는 비극을 맞이하니 애국지사들도 많이 나오고 간신배들도 속출했다. 그러나 힘도, 이름도 없는 일개 하급관리이자 서민이었던 소부의 주인의식과 실천은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는 나라를 152년간이나 버틸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지금 지구의 도시화 속에서 이름 없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민들이 바르고 힘이 있는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공부하고, 많이 듣고, 넓게 보고, 생각하며 실천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다시 『논어(論語)』 「자로(子路)」편 제3절에 있는 공자의 “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를 읽는다.

 

<2008.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