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나!

  • 날짜
    2019-07-15 1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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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나!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러일전쟁 종결회담인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 직전인 1905729일 동경에서 당시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郎, 1848~1913)와 훗날 미국의 제27대 대통령이 되는 당시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와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비밀합의각서(밀약)’를 맺는다.

 

내용을 간추려보면 미국은 일본의 필리핀군도 불침확약조건으로 한국에서 일본의 자유행동권(free-hand)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미국이 인정한 것이고, 한 달 후인 95일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조약 중에 한국 문제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재차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조선은 같은 해 10월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박사를 특사로 임명하여 미국 대통령 T.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에게 고종의 친서를 보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와이 교포 8천여 명을 대표해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윤병구(尹炳求, ? ~ 1949)가 대한독립청원서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으나 역시 회답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자국의 이해관계가 없으면 약소국가의 희망은 강대국에 의해 무시되거나 짓밟힌 사례가 허다했다.

 

1948, 510일 유엔 결의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531일 제헌국회가 개원하여 720일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미국은 19471114, 유엔 총회에서 결의된 모든 점령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그들의 군대를 가급적 신속하게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시키며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완료할 것을 권고한다라는 사항을 준수한다면서 주한 미군 철수를 밝혔다. 이에 한국 국회는 미군 철수 반대를 결의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방위공약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군사고문단 오백여 명을 남겨놓고 19496월 완전히 철수했다. 그 후 1950120, 미 국무부장관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인해 북한과 중국, 소련은 유사시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할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어 625전란을 겪는 빌미가 되었다. 왜 미국이 아시아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는 방위정책, 일명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간에 많은 의문을 남겨 놓고 있다. 전 국무부장관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5.27 ~ )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으로 오인하고 중국의 군사원조를 받아 북남통일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중국은 장개석과의 4년간 내전(內戰)이 막 끝난 상황이므로 피로 누적과 재정비가 절실한 상황이 엇가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소련은 적극적인 참여를 권했다.

 

소련이 중국의 한국전쟁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유한 첫 번째 이유는 19494월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캐나다, 이탈리아, 덴마크,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12개 국가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하여 반소군사동맹을 결속시킨 것에 비해서 소련을 중심으로 동구권 8개국, 폴란드, 동독,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등의 군사동맹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그 후 5년이 지난 1955년에 가서야 결성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유럽에 주둔하던 군대가 한국으로 오게 되므로 그만큼 유럽의 미국 군사력이 약화된다고 생각했다. 또 전쟁이 길어지면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킴으로서 동서로 군사력을 양분하여 약화시킨다는 군사적 전략이 있었다.

 

두 번째로 소련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은 통일된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면 그만큼 소련에 더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을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찍이 한비자(韓非子, BC 270년경~BC 233)가 주장한 것처럼 이렇게 강대국들은 자국의 세()를 넓히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이 사이에 낀 나라와 국민들이 각성하지 않으면 더 큰 어려움을 당하는 법이라는 역사적 교훈은 너무도 많다.

 

이 근래 미국과 중국이 경제전쟁을 하면서 한국 정부에 무리한 요구들을 해오는 상황에 대해 정부와 함께 우리 국민까지도 모멸감을 느낀다.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내밀하게 서로 부탁도 하고, 압력을 가할 수도 있지만, 공공연하게 국제사회가 다 알도록 기자회견, 매스컴 그리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공직자가 서슴없이 발언한다는 것은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민은 무한하다는 원리를 모르는 경박한 행동이다. 국가 운영의 책임을 지는 정부는 그렇다쳐도, 정치권에서 이에 대한 마땅한 대응이 없다는 것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매우 섭섭한 일이다.

 

옛말에 위에서 선비들이 염치를 잃으면 아래에서는 백성이 살아가기 어렵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국민들 앞에서 염치를 잃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명년 선거에 표를 달라고 외칠 수 있을까! 이름 있는 학자나 교수 그리고 역사를 바로 볼 줄 아는 언론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최근엔 일본조차 미국이나 중국을 본 따 한국에 경제적 압력을 가한다. 이는 앞서 미중 양국이 보인 태도에 한국 정부와 국민의 반응이 지나치게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 왔기에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결과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일본이 우리보다 경제력이 우세한 것은 인정하지만, 이처럼 무례하고 지나친 태도를 취하는 것에 한 마디도 못하는 저자세(低姿勢)는 버려야 한다.

 

이 나라는 어느 정당, 정파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임을 명심해야 한다. 국가간의 외교문제를 정파와 정당의 이익에 기초해서 판단하고 발언한다면 이야말로 이 나라 역사에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강대국들이 상대국 정부에 대해 모진 짓을 강압하더라도 깨어있는 국민 앞에서는 멈칫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정치권이 혼란하여 제 갈 길을 찾지 못할 때일지라도 우리 국민이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은 남이 해줄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다투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9.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