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 상해의 독립유적지를 찾아서

  • 날짜
    2019-05-09 18: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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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상해의 독립유적지를 찾아서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삼일독립운동은 삼십삼인의 지도자와 자아각성한 학생을 비롯해 팔도강산의 이름 없는 민초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 팔천(八賤 : 노비, 기생, 백정, 광대, 공장, 무당, 승려, 상여꾼)이라고 천대받아온 사람, 저 멀리 제주의 해녀에 이르기까지 백성의 나라라는 의식이 관통되는 울림이고 반성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물러간 후 북한은 무장투쟁만을 앞세워 삼일운동의 정신이 퇴색하였고, 남한은 친일잔재들이 관료사회의 중임을 맡았기 때문에 민족정기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어 그 가치가 널리 이해되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일제 35년을 청산하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가 백주 대낮에 테러를 당하는 치욕에 이르러 그 많은 독립유공자와 애국자들이 그 빛을 잃고 묻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일운동 무렵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1912) 이후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의 성립으로 초기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원세개(袁世凱, 1860~1916)의 집권 이후 독재통치와 복고풍조가 기세를 떨쳤고, 그의 사후 북경정부를 장악하려는 군벌 사이의 혼란스러운 내전이 만성화되어 짧았던 민주주의의 실험은 참담한 실패와 환멸을 가져왔다. 이런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1915년을 전후하여 북경대학교 교수 진독수(陳獨秀, 1879~1942), 이대조(李大釗, 1888~1927), 아큐정전의 저자이자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노신(魯迅, 1881~1936), 미국 코넬대학교 컬럼비아대학에서 7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백화문 사용을 선언한 호적(胡適, 1891~1962) 등이 각자 지향하는 노선을 넘어 의기투합하여 신청년(新靑年)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낡은 도덕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여 큰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신문화운동의 선두주자였던 진독수는 조선의 삼일운동을 평하며 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절실하고 비장하며 또한 명료하고 정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민의(民意)로 하고 무력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계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찬미와 애상과 흥분과 기대와 수치 등 갖가지 느낌을 가지게 된다. (……) 조선민족의 이 영광스러운 행동을 보니 우리 중국민족의 초라함으로 인한 수치감이 더욱더 느껴진다. 공화국이 된지 이미 팔년이 되었지만 일반 국민들이 명료하고 정확한 의식을 가지고 어떠한 행동도 한 적이 없다. 신해혁명의 성과는 대부분 도적들과 무뢰한들이 광복의 명의를 빌려 약탈해 갔다.”고 자탄했다. 이것은 1919323매주평론14호에 실린 글이다.

 

조선의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진독수가 격려의 글을 발표하고 두 달이 지난 191954, 베이징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매국 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천하를 울린 것이 이른바 5·4운동이었다. 191811월 독일이 항복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중국은 연합국에 참여했으므로 산동과 만주에서 잃었던 주권을 의당 회복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파리평화회담의 핵심 의제 중 하나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었지만 중국의 희망은 강대국들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 전에 일본의 산동과 남만주 등의 이권을 확보하는 내용을 담은 ‘21개조 요구가 원세개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1917년 이후 일본은 중국에 막대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1918년부터 중국 영토 내에서의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행동, 군사기지 설치 등을 허락하는 비밀 협약을 맺은 것이다. 따라서 독일이 점령했던 청도는 마땅히 중국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관할로 발표되었다. 중국 민족이 죽지 않은 이상 학생들이 반발하고 나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54일 오후 천안문 광장에는 베이징대학교를 비롯해 13개 대학교 및 전문대학 등 학생 약 3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21개조를 취소하라!”, “청도를 반환하라!” “매국노를 처단하라!”라고 외쳤다. ‘21개조의 책임자인 조여림(曹汝霖, 1877~1966)의 집을 불태우고 파면을 요구했다. 정부는 천여 명의 학생을 구속했다. 학생들의 체포 소식이 당시 중국 경제의 중심인 상해로 번지자 상해의 상가들은 항의의 뜻으로 일제히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파업했으며 도시 유곽의 여인들까지도 저항에 동참했다. 부두노동자들의 작업 거부로 일본 화물선은 하역을 하지 못한 채 항구를 떠나야만 했다.

 

이것은 중국 오천년 역사에 민중과 학생이 중심이 되어 20개 성()100여 개 도시가 이에 항거한 것으로는 처음 있는 거사였다.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매국정책에 저항하며 민권을 제창하고 부패한 관료정치에 반대하는 5·4운동의 정신은 1921723~30일에 열리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초석이 되었다. 프랑스 조계지 망지로(望志路, 지금은 興業路 76)에 있는 공산당 창당 주역 중 하나인 이한준(李漢浚)의 형 이서성(李書城)의 자택에서 비밀리에 그리고 초라하게 시작되었다. 그마저도 경찰에 쫓기어 절강성 가흥(嘉興)에 있는 남호(南湖)의 유람선상에서 730일에야 회의를 끝맺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같은 프랑스 조계지 안의 멀지 않은 곳에서 중국공산당 보다는 2년 앞서 수립되었다. 중국현대사에서 태산 같은 위치에 있는 5·4운동보다 3·1운동이 앞서 궐기했다. 필자가 1991년 중국공산당 제일회지(第一會址)를 찾았을 때만하더라도 상해임시정부보다 더 초라했다. 당시에는 모택동이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역처럼 선전하고 있었는데, 금년 4월말 역사기행으로 찾은 그 기념관에는 과거와 달리 모택동의 색채가 많이 옅어져 있었다.

 

역사는 느리지만 권력에서 벗어나 그 스스로의 내용을 천하에 밝히는 모양이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것은 참으로 귀하고 남보다 앞선 것이 많은데, 왜 우리는 피와 노력과 사명을 다해 얻어낸 역사를 찾는 것이 이렇게 더디고 힘든 것일까? 시민이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만이 길이다. <2019-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