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죽산조(竹山鳥)의 울림

  • 날짜
    2019-03-20 10: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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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731일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1899~1959) 선생이 서대문 교도소에서 법살(法殺) 당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이듬해 1960315부정선거가 있었다.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어 419학생의거로 이어졌다.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해 인천 출신인 장면(張勉, 1899~1966) 선생은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의원내각제에서 국무총리로 선출된다. 그러나 1961516군사정변(軍事政變)으로 장면 정부가 물러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1959년부터 2년 사이에 인천의 큰 정치인 두 분 중 한 분은 살아있는 생명을 잃었고, 다른 한 분은 살아서도 정치적 생명을 잃었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을 중심으로 젊은 장교들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정당 및 사회 각개 단체들을 일제히 강제 해산시키고 주요 인사들을 구속시켰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관련자, 부정축재자는 물론 장면 민주정권의 각료, 혁신계 정치인, 419학생의거 주동학생, 진보성향의 언론인, 변호사 등 군사정변의 반대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몰아서 구속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이 모두 갇혀서 역사 이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수감된 것은 처음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당시 32살의 민족일보사장 조용수(趙鏞壽, 1930~1961), 독립운동가이자 사회당의 최백근(崔百根, 1914~1961), 3·15부정선거의 주모자 최인규(崔仁圭, 19191961), 4·19당시 학생들을 습격했던 깡패 임화수(林和秀, 1924~1961), 4·19당시 경무대 앞에서 발포를 명령했던 곽영주(郭永周, 1924~1961), 정치깡패였으나 태도만큼은 의연했던 이정재(李丁載, 1917~1961)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위의 여섯 사람 중 조용수(2008)와 최백근(2010)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더라도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기까지는 일정하게 시간을 두는 편이고, 최근 우리나라는 사형 판결을 내리더라도 실제 집행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당시 군사법정은 판결 직후 하루에 세 사람도 처형했다.

 

형무소 내에서는 사형집행이라는 말을 피하여 넥타이 공장이 돌았다는 은어를 사용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돌아가신 뒤 서대문 교도소에는 어느 날부터 큰소리로 우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은 많은데 막상 직접 새를 보았다는 사람은 드물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좁다란 방에 갇힌 사람들은 교도관을 비롯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저 소리는 죽산 조봉암 선생이 억울하게 죽어 환생한 거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낮고 우렁차게 들리는 새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죽산조(竹山鳥)가 왔다고 말했다. 죽산조는 궂은비를 몰고 오곤 했다.

 

통일을 지향했던 민족일보에서 2개월간 편집국장으로 몸담았다는 죄명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 양수정(梁秀庭)은 출옥한 뒤에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라는 한 권의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시중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사형수가 사형장 문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하늘을 보고 땅을 보게 된다고 해서 나온 책제목이었다. 감옥 안에 갇힌 수인(囚人)과 교도관들에게만 회자되던 죽산조가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온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남긴 기록 덕분이지만, 죽산조는 죽산 선생이 평생 가지고 있었던 서민에 대한 애틋한 정서와 평화통일에 대한 갈망이 전설로 이어진 것이다.

 

절대로 비루한 짓은 하지 말아주게. 내가 정치운동을 하다가 죽는 것은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어떻게 비루하게 생명을 빌겠는가.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을 할 날이 올 것이고 바라고 바라던 밝은 정치와 온 국민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열매를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를 뿌려놓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윤길중, 이 시대를 앓고있는 사람들을 위하여중에서

 

이것은 사형을 앞두고 면회온 청곡 윤길중(靑谷 尹吉重, 1916~2001) 선생에게 그가 남긴 말이다.

 

사형대에 올랐을 때, 선생은 사형을 집행하려면 수염이나 깨끗이 깎이고, 머리 빗질이며 몸단장이라도 좀 시키고서 할 일이지……라며 여유를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가족이 다 알아서 하겠지……. 다만 한 마디 남겨놓고 싶은 것은 이 나라에서 정치 투쟁을 하다가 지면 이렇게 될 줄 짐작 못한 바가 아니다. 그 희생물로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저절로 숙연해져 가슴이 저려온다.

 

죽산 선생이 평화통일의 기치를 어렵게 들었을 때, 세계는 미소 냉전이 극에 달했고, 한반도 분단의 현장에는 철책선이 앞을 가리게 되었고, 그 뒤로 보이지 않는 죽의 장막, 철의 장막이 우리를 숨 막히게 짓누르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상황은 여전히 힘들고 어지럽게 난마(亂麻)처럼 얽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과 황해의 평화를 이끌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땅의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한 맺힌 통일과 평화의 바람을 우리가 풀기 위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그 숨소리,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이 과제는 그 누구도 대신 풀 수 없고,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