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기미와 조공

  • 날짜
    2017-08-23 10:48:52
  • 조회수
    876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데 재벌들이 줄줄이 따라나서고, 약 40조원의 협력자금을 마련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저절로 왕조시대의 조공(朝貢)을 떠올리게 되어 씁쓸한 마음이 든다. 정상외교도 일상적인 상거래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과거 왕조시대에도 황제에게 조공물을 올리면 희사품을 내리고 이를 황송하게 받는 것을 조공무역이라 말하기도 했다.  
오늘의 국제관계는 큰 나라들이 큰 몸집만큼 통 크고 인류를 위해 명확한 미래를 제시하기보다는 자국만의 이익을 위해서 세계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경향이 짙어 서글프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은 앞으로 중국도 가야하는데, 한·미간 회담 내용이 대부분 드러난 상황이라 우리 정부 운신의 폭이 그만큼 좁고 어려울 것 같다.  

영국박물관을 몇 차례 간적이 있었는데, 처음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한국관이 개설되어 있었다. 우리 국력이 그만큼 신장된 결과였다. 그러나 한국관 벽면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의 19대 국왕인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 임금이 사대부 아무개에게 정이품 벼슬을 제수한다고 내린 교지를 바라보는 마음은 무거웠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커다란 크기의 교지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연호(年號)를 보니 청나라 5대 옹정(雍正, 1678~1735, 재위 1720~1735) 황제로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공로 있는 중신에게 임금이 벼슬을 내리는데 어찌해서 조선왕조 임금의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중국 연호를 사용해야 했을까? 다시 말해 숙종 몇 년에 아무개에게 벼슬을 준다고 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외국의 박물관에서 이런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기분은 숙연하다 못해 부모 잃은 고아처럼 서러웠다. 우리가 국가의 자존을 높이 세우지 못하고, 다른 강대국의 연호를 받아 사용하는 힘들고 뼈아픈 상황이 역사적으로 반복된 데에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지만, 강자가 약자를 누르고 수탈하는 것은 현실의 뼈아픈 상식이다. 

중국과 주변 약소국의 관계를 정교하게 만드는 논리를 생각해보면 우선, 첫 번째가 기미 정책이다. 기미라는 말은 `굴레`를 뜻하지만, 그 정치적 속사정은 다르다. 소와 말 머리에 굴레를 씌워 줄을 길게 늘어놓으면 우마(牛馬)는 자신들이 고삐 잡힌 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풀을 뜯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줄 착각하게 만드는 음흉한 계책이기 때문이다. 강자는 평소에는 고삐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주지만 필요하면 언제라도 바싹 죄기 때문에 약자는 스스로 종속되어 있는 처지를 잊고 있다가 갑자기 고통 받게 된다. 

이 말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 쓴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이다. 사마상여(BC179~BC117)는 한 무제(漢武帝, BC156~BC87)가 총애하던 문신으로, 그는 한때 서남(西南, 운남성 주변)의 소수민족과 한나라의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가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공을 세우고 돌아와 한 무제에게 올린 글을 보면 `대략 듣자하니 천자는 이적(夷狄)을 대할 때 의(義)를 내세워 마치 우마의 고삐처럼 죄었다 풀면서 관계를 끊지 않는 계책만 구사할 뿐이라고 합니다`라고 그 지역 원로들의 불만을 전하면서 조정의 서남이(西南夷)에 대한 기미정책의 부당함을 간접으로 비판한 것이다. 

사마상여는 이어 변방의 오랑캐라 하더라도 기미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도덕의 길을 세우며 인의의 전통을 세워 은혜를 널리 베풀고 먼 곳의 백성을 어루만져 소원한 자가 절망하지 않게 하고 사방이 막혀 미개한 자에게 광명의 빛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토벌을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원근을 하나로 만들고 안팎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헌책(獻策)하였다.  
미국의 국제문제 전략가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K. Brzezinski, 1928~2017)는 냉전 해체 이후 미국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세계 최상의 지위(global supremacy)`를 구가하고 있으며, 그 지위는 경쟁 상대가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이 `세계 최상의 지위`를 구사하게 된 기간 동안 미국 정치(세계전략)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형편없었다`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미국이 구사한 세계전략이 무력에 의존하는 힘의 우위를 앞세운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사마상여는 힘없고 미개한 변방의 소수민족이라 하더라도 도덕과 법으로 다스려야지 고삐를 죄듯 힘으로만 눌러서는 안 된다고 한 무제에게 풍간(諷諫)했다. 사마상여와 브레진스키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부담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힘의 정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우회적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진 힘을 전가지도(傳家之刀)처럼 휘두른다. 우리 조상들도 과거 천하를 호령하던 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이 평화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李成桂)가 수창궁(壽昌宮)에서 등극하여 조선이 개국한 이래 505년이 되는 1897년 8월 17일을 원년으로 고종이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는데, 왕에서 황제에 이르는 시간은 너무나 길고도 길었다.  

두 번째 조건은 임금과 세자는 황제 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주변 국가 및 민족의 군주는 천자의 책봉을 통해 명목상 군신 관계를 체결해야만 이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의 외교질서 속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책봉에 의해 중국 천자의 신하가 된 군주의 국가를 책봉국이라고 하는데, 책봉국이 되어야만 중국의 군사적 압력을 피할 수 있고, 중국을 배경으로 주변국가나 민족에 비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중국은 조공무역을 제외하고 외국과의 독자적인 무역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중국과 책봉국 군주는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조건은 군대를 함부로 늘려서도 안 되고, 성(城)을 축조해도 너무 높이 쌓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중국 우위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은 때때로 부족하고 귀한 조공물을 요구했지만, 그 대가로 책봉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 때에도 황소를 수천마리 조공하였지만, 명나라는 조선이 여진족을 축출하고 육진을 개척할 때 간섭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강대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방도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지도자가 현명하고, 국가와 국민 사이에 신뢰 관계가 구축된 국가는 강대국과의 외교에서도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 세계는 WTO, IMF, 세계은행을 비롯해 다양한 국제기구가 보이지 않는 철의 거미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국제기구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런 기구들을 만든 것은 강대국들이고, 그들의 이익에 따라 운영된다. 우리 시민들이 깨어있고, 지도자가 현명하다면 우리에게 이익이 되겠지만, 눈앞의 안일과 이익에 젖어 먼 길을 잃는다면 우리에게 닥쳐오는 상황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자기 나라의 이로움을 제치고 한국을 도와줄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현실을 절감해야만 한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나라와 민족이 높은 고비와 깊은 질곡을 벗어나 험난한 바다를 항해한 결과이며, 지금도 이어져가는 과정이다.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깊은 성찰을 통해 도전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